‘차별없는 세상’ 희망품은 그때 무지개를 기억해요
전주살이를 시작한 지 반년이 조금 지난 퀴어입니다. 이사 온 이후로는 더 이상 제가 사는 도시가 어디에 있으며 어떤 곳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되어서 편해요. 제가 자란 익산은 한두 다리를 건너면 다들 아는 사이일 것만 같은, 조금은 복작복작한 느낌이 드는 곳이에요.
언젠가부터 “우리 꼭 인서울 하자”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기 시작했어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해서, 스무살이 되자마자 집에서 탈출하는 게 제 계획이었어요. 익산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면서도 여기 어디에도 저와 제 친구들의 자리는 없는 것 같았거든요. 서울에 사는 가족에게서 들었던 “익산에 살면 너 같은 사람이 없어서 외롭겠지만 서울에 오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거야”라는 말이 탈출에 대한 갈망을 키우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 스무살이 지나서도 여전히 전북에 살고 있습니다. 낯선 서울에서 제 자리를 새로 만들어내는 것보다, 내가 살아왔고 살고 있는 곳에서 더 버텨보고 싶은 마음이 커져서요. 떠나고 싶던 마음과 남은 마음을, 그런 마음이 들게 한 몇개의 기억을 나누고 싶어요.
한옥마을 덮었던 거대한 무지개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학교는 무력함을 배우는 곳이었어요. 윤리 수업 장면 하나가 기억에 남아요. 그날은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내용을 배울 예정이라 기대를 하고 있었어요. 교과서에서 성소수자의 인권을 다루고 있다는 것만으로 어쩐지 힘이 나는 것 같기도 했고요. 그런데 수업을 하던 선생님은, 교재에는 이렇게 되어 있지만 자신의 생각은 다르다며 성소수자는 소수자가 아니며 청소년들을 병들게 하는 차별금지법을 막아야 한다는 말씀을 이어가시더라고요.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말을 꺼내기도 전에 두려움이 먼저 들었어요. 그런 말을 하는 건 제가 성소수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 같았거든요. 고민하다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얼굴로 우리 반에도 성소수자가 있을 수 있으니 그런 말씀은 주의해달라는 말만 겨우 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친했던 친구가 우리 반에 레즈비언이 있다는 소문을 들어봤냐고 묻더라고요. 아마도 저나 제 친구를 의심하고 떠보는 것 같아 불안했어요. 소문이 어디까지 퍼져 있는 건지, 괜히 나 때문에 다른 친구가 위험해진 건 아닌지 하는 걱정이 되더라고요. 혐오의 말은 너무 당당하게 이야기되는 반면 그걸 막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건 더 큰 폭력을 각오해야만 하는 상황이 감당하기 어려웠어요. 내가 다치지 않을 수 있는지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면서 많은 말을 삼키게 됐고요.
답답한 마음에 방학 내내 다른 지역에 살러 가보고,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 찾아가기도 해봤어요. 하루는, 서울에서 퀴어퍼레이드가 열린다는 소식에 기차를 타고 무작정 서울에 갔어요. 사람들마다 각자 원하는 대로 입고 꾸민 모습이, 어떤 삶의 방식과 정체성을 가지고 이 자리에 왔든 간에 환영한다는 말을 건네는 것 같았어요. 광장 바깥에서 우리의 존재를 부정하는 소리가 들어오면, 더 크게 사랑을 외쳤어요.
여기저기에서 온 사람들이 차린 부스 중에 하나가 눈에 띄었어요. 커다란 전국 지도가 세워져 있고, 어디에서 왔는지 스티커로 표시할 수가 있더라고요. 익산에 스티커를 붙이려다 보니, 제 앞에 벌써 세개가 붙어 있었어요.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을 서울에서 만났다는 게 반갑고 신기하면서도 익산에서 만났다면 서로 알아볼 수는 있었을까, 익산에서 만난 적 없는 우리가 왜 서로의 존재를 작은 스티커로 확인해야만 할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어요.
주말이 지나 학교로 돌아왔을 때에도 축제의 들뜬 기분과 자긍심이 남아 있었지만, 학교는 평소 그대로 안전하지 못한 공간이라서 허무하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곧 거기서 겪은 것들이 의미 있는 건 하루 잠깐의 해방감 때문만은 아니란 걸 알았어요. 여전히 막막하더라도 덜 지칠 수 있었어요. 그렇게 학교 바깥에서 힘을 얻어와 학교에서 써버리기를 반복하다 졸업을 했어요. 뭐든 하고픈 마음과, 이제 내가 어디에서 뭘 하면 좋을지 혼란스러운 마음이 교차했어요.
그러던 와중에 전주에서 퀴어퍼레이드를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너무 반가웠어요. 설레는 만큼 걱정도 되었고요. 누군가 마주치면 어쩌나, 혹시나 반대 집회에 아는 사람이 있을까 무섭기도 했어요. 행진이 시작되며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과 평등을 외치는 걸 보면서 그런 고민은 잊혀갔고, 마지막에 한옥마을을 덮는 거대한 무지개를 보며 마음이 벅차올랐어요. 자주 오던 곳인데도 그 안에서 내가 나로서 걷고 있다는 차이 하나만으로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공간으로 보였어요. 내가 나로 살기 위해 떠나거나 숨어야만 하는 건 아니라고, 그러지 않고서도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생각하게 됐어요. 그 길에 함께하고 싶었어요.
더는 숨거나, 도망치지 않도록
더 이상 숨거나 떠나려 하지 않도록, 나 자신으로서 전라북도에 남을 수 있도록 하는 차별금지법을 기대해요. 차별금지법이 누구도 혼자 남겨두지 않는 약속이라는 말을 좋아해요. 우리 사회에 뿌리박힌 차별은 우리를 숨게 하고, 도망치게 만들고, 함께하지 못하게 만들었어요. 내가 나로서 드러나는 게 수치나 두려움이 아니라 자긍심일 수 있다면 우리는 더 힘 있는 목소리로 말할 수 있을 것이고, 그걸 듣고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고, 살아온 땅을 단단히 디디며 평등한 세상으로 걸어갈 수 있을 거예요.
힘이 부칠 때마다 전주 한옥마을에 뜬 무지개를 기억해요. 지금 전주에 살고 있는 건 그날의 기억 덕인 것 같아요. 하루 축제를 넘어서 모든 일상이 무지개 빛깔로 채워진 전북을 한번 꿈꾸어봐요. 집집마다 무지개 깃발이 걸려 있는 익산 어양동의 아파트 단지를, 다양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무지개를 들고 군산 수송동 롯데마트 앞을 행진하는 모습을, 김제·부안·정읍…. 어느 곳에 가나 그곳만의 무지개가 떠 있는 전북을요.
※ 이 글은 〈한겨레S〉의 '차별금지법 있는 나라' 릴레이 연재 코너에 2022.4.3.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