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단체연석회의 성명>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이하 '범민련 남측본부')의
성소수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운동사회 내의 신뢰를 훼손하는 처사에 대한
인권단체연석회의의 입장  


지난 3월 범민련 남측본부 기관지 '민족의 진로(3월호)'에 "실용주의의 해악에 대하여"란 글이 실린 이후, 이 글의 일부내용이 갖는 문제점에 대해 운동사회 내에서 논란이 있었다. 논란의 핵심은 이 글이 동성애와 트랜스젠더, 이주노동자문제 등을 부정적인 사회문제들로 묘사하고, 이러한 문제가 발생한 원인을 민족성이 견지되지 못한 상태에서 외래의 것이 침습하여 발생한 문제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 있었다. 이 때문에 지난 4월부터 7월까지 성소수자운동단체, 이주노동자운동단체, 민주노동당 등 여러 인권사회단체들은 범민련 남측본부를 상대로 해당기사에 드러나고 있는 소수자에 대한 몰인식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해당기사의 삭제와 공식적인 사과를 요청해왔다.

그러나 지난 4개월간 운동사회가 진행한 이런 노력에 대해 범민련남측본부가 보인 모습은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해당기사의 몰인식을 지적하고, 이에 대해 범민련 남측본부와 대화함으로써,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믿어왔던 우리의 기대는 산산조각 났다. 오히려 지난 4개월 동안 범민련 측본부가 취한 태도들은 상당부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고, 성소수자인권운동을 비롯한 우리 인권운동은 모멸감마저 느끼는 상황에까지 도달하고 말았다.  

운동단체들 사이의 연대란 서로의 존재와 운동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성소수자인권단체이주노동자단체민주노동당 등이 범민련 남측본부에 질의하거나 공식적인 사과 등을 요청하였던 것은, 이 같은 연대의 기본적인 조건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범민련 남측본부는 여러 인권사회단체들의 이런 희망에 대해 분명한 태도와 입장을 보여주지 못했고, 그 결과 우리가 범민련 남측본부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상당부분의 신뢰 또한 무너져버리는 상황에 도달하고 말았다. 이에 우리 인권단체연석회의는, 범민족연합 남측본부가 보인 성소수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대해, 그리고 운동사회내부의 여러 노력에 대해 범민련 남측본부가 보인 실망스러운 태도에 대해 우리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힌다.

문제의 발단은, 범민련 남측본부 기관지 '민족의 진로' 3월호에, "실용주의의 해악에 대하여"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이 게재되면서 부터이다.

"이남사회는 갈수록 복잡한 문제들이 발생되고 있습니다.  외국인노동자문제, 국제결혼, 영어만능적사고의 팽배, 동성애와 트렌스젠더, 유학과 이민자의 급증, 극단적 이기주의 만연, 종교의 포화상태, 외래자본의 예속성 심화, 서구문화의 침투 등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상상할 수 없는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90년대를 기점으로 우리사회에 신자유주의 개방화, 세계의 일체화 구호가 밀고 들어오던 시점부터 이러한 문제들이 사회문제로 대두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형은 달라도 결국은 이남사회가 민족성을 견지하지 못하고 민족문화전통을 홀대하며, 자주적이고 민주적이지 못한 상태에서 외래적으로 침습해 오고 그것이 또한 확대 재생산되는 구조 속에서 이 문제들이 점차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 민족의 진로 3월호에 실린 조직위원회 명의의 글

이 글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우리가 읽은 대로라면, 우선 이 글은 이주노동자, 동성애, 트렌스젠더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서 시작하고 있다. 동성애와 트렌스젠더의 존재가 "영어만능적 사회, 극단적 이기주의의 만연, 외래자본의 예속성 심화, 서구문화의 침투"등과 같은 수준에서 열거되면서, "불과 몇 년 전 만해도 상상할 수 없는" 부정적인 사회현상의 하나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동성애와 트렌스젠더의 존재 자체를 부정적인 사회현상의 하나로 취급하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 글은 매우 반인권적이다. 성소수자에 대해 이런 인식을 갖고 있는 마당에, 성소수자들이 겪고 있는 차별과 억압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이나, 성소수자인권운동의 의미에 대한 제대로된 인식을 과연 기대할 수는 있는 것인지, 참으로 의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다음 단락에서는 더욱 우리를 아연실색하게 만드는 구절이 등장한다. 범민련 남측본부 조직위원회 명의의 글은 동성애와 트렌스젠더 등의 사회문제를 언급하면서, 유형은 다르지만, 민족의 단일성을 견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외래의 것이 침투하고 확대재생산된 것이 그 원인이라고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민족의 진로의 기사가 내걸고 있는 민족성의 견지라는 것이, 단일하고 순결한 혈통의 보존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런 맥락에서 민족성을 해체하는 문제로, 이주노동자동성애와 트렌스젠더 국제결혼 등을 열거한 것이라면, 이는 매우 큰 문제일 수 밖에 없다. 이런 논리는 민족의 단일성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면서 여러 차이와 다양성을 억압하는 집단주의적 논리로 변형될 위험이 크다. 혈통중심의 민족지상주의는, 여러 다양한 차이를 갖는 사람들과 이주자들을, '우리'와 다른 이방인으로 규정하고, 이들에 대한 공포와 경멸적대심을 유발하는 억압적인 이데올로기로 기능해왔다. 동성애자인권연대가 6월 7일자 성명에서 "범민련 남측본부 측에 위협감을 느낄 정도이다"라고 말한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주노조가 해당기사에 대해 '이주노동자들을 한국의 민족성과 혈통을 어지럽히는 존재'로 바라보고 있다며 비판하면서, 우파 정치인들이 벌이는 인종주의적 공격에 대해, '과연 <실용주의>의 필자와 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피억압자를 방어할 수 있겠는지', 되물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는 민족의 진로 3월호에 실린 문제의 기사가, 여러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직접적인 위협감과 모멸감을 안겨주는 '폭력'으로 기능했었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 범민련 남측본부가 깊이 성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더욱 문제 삼고 싶은 것은 이 기사의 내용이 공개되고, 운동사회 내에서 이 문제를 풀어보기 위해 여러 노력들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범민련 남측본부가 보인 태도이다. 우리는 범민련 남측본부가 심각하게 제기된 이 문제에 대해 진정성을 가지고 성찰해주길 바랬고, 해당기사로 인해 손상되었을 다른 운동단체들의 신뢰를 다시 진작시키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해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범민련 남측본부가 보인 모습은 우리의 희망에 많은 부분 못미치는 것이었다.  

처음 이 기사의 내용을 접한 동성애자인권연대는 공개적으로 문제제기하기 보다는 비공개적인 방식으로 범민련 남측본부에 그 진의를 물어보고, 또 성소수자의 존재자체를 폄하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해당기사를 삭제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동성애자인권연대가 4월 13일 1차 질의공문을 발송한 이후 무려 한달 반이 지나고, 급기야 5월 29일에 3차 질의공문(5월 31일까지 답변 촉구)을 발송할 때까지, 범민련 남측본부는 동성애자인권연대의 질의에 대해 그 어떤 성실한 답변의 태도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5월 31일에 동성애자인권연대에 보낸 1차 답변서에서는 질의내용에 대한 성실한 답변과 사과는 커녕, "편집의도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면 보내온 글을 살려 싣고 있"으며 거론된 문제가 "소수자문제를 언급한 것이 아니라 <복잡해지는 사회현상>에 대해 언급한 것"이라는 등의 어의 없는 답변을 보내오기에 이른다.  

한달 반이 넘게 기다려 받은 이런 내용의 공문에 대해, 과연 수긍할 수 있는 단체가 얼마나 있을까? 동성애자인권연대가 연대하고 있는 다른 단체들에게 관련사실과 문제의식을 공유하게 된 것도, 이를 계기로 해서이다. 이에 따라 6월 5일 민중언론 참세상에 이 문제가 처음으로 기사화 되고, 6월 7일에는 동성애자인권연대의 공개성명이, 6월 7일에는 민주노동당 대변인의 논평이, 그리고 6월 11일에는 서울경기이주노조의 공개성명이 발표되게 되었다. 이렇게 여러 인권사회단체들이 공개성명을 통해 잇따라 문제를 제기하자, 6월 12일 범민련 남측본부는 교육위원장 명의로 2차 공문을 보내오게 되었다.  

그러나, 2차 공문을 통해 범민련이 보내온 입장도, 우리로서는 수긍하기 어려운 성격의 것이었다. 우선 2차 공문을 통해 범민련이 보내온 답변은, 동성애자인권연대가 요구해왔던 질의에 대한 제대로 된 답변과는 거리가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성소수자를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를 폄하한 부분에 대해서도 공식적인 사과를 담지 않은 공문이었다. 오히려 범민련 남측본부는 2차 공문을 통해 "특정 글 내용과 그에 대한 질의로 시작하는 논의는 처음부터 대립적인 측면이 부각되어 모두에게 이롭지 않을 것"이므로, "입장을 이 정도로 논의"하자면서 인권사회단체들의 대응방식을 문제 삼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성애에 대해서는 범민련 남측본부가 "동성애에 대한 관점과 입장의 <차이가 분명히 있음>을 확인" 한다면서, "인권적 측면에서 동성애 문제를 악의적이거나 배타적으로 대할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적 조건과 당사자의 의식형성과정 또는 생체학적 불가피성과 경향성에 대한 고려 또는 새로운(또는 원래부터 있은) 사회 및 문화현상 등의 측면에서 신중하게 대해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당시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도 벌어지게 되는 데, 성소수자운동단체에 대한 이런 태도와는 다르게, 경인지역이주노조에 대해서는, 해당기사의 작성주체인 조직위원회 명의로, "해명의 글"(6월 15일)을 발송하면서 범민련 남측본부가 공식적인 사과에 나섰다는 것이다. 우리는, 범민련 남측본부가 동일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성소수자운동단체와 이주노동자운동단체에 대해 각각 별도의 차별적인 태도를 보인 점에 대해서도 의아하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인권단체연석회의가 민족의 진로의 해당기사에 대해 사실을 인지한 것도 이 즈음이다. 당시 인권단체연석회의는, 당장에 민족의 진로의 기사내용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성명을 내는 것 보다는, 소속단체들과 범민련 남측본부사이의 대화를 중재함으로써, 동성애자인권연대의 요구사항(공식사과와 해당기사 삭제)에 대해 확답을 받고, 범민련 남측본부가 가지고 있는 성소수자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바꾸고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보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관련단체 회의를 통해, 인권단체연석회의가 범민련 남측본부 관계자와 성수수자단체의 만남을 주선하고, 해당기사 삭제와 공식사과(홈페이지, 지면)을 요구하며,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한 간담회 등의 방안 추진 등을 요청하기로 결정하고, 6월 26일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과 만남의 자리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6월 26일 진행된 만남의 자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희망과는 다르게 진행되었다.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은 "성소자측에서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할 뿐이었고, 동성애자인권연대 사무국장이 "이조노조에는 글 작성의 주체인 조직위원회 이름으로 사과하고 해명했는데, 왜 같은 내용인데 성소수자문제에 대해서는 어떠한 대답도 없느냐"라고 물었으나, 사무처장은 "모르는 일"이라고 답할 뿐이었다. 결국 공식사과, 해당기사 삭제, 간담회 추진 등 요구사항에 대한 확답은 전혀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당시 참석자들은 7월 2일까지 범민련 남측본부가 공식 입장을 달라고 요청하는 것으로 그날의 자리가 마무리되게 되었다.

인권단체연석회의는 7월 2일까지 범민련 남측본부의 답변이 없어서, 다시 요청한 끝에 7월 11일 교육위원장 명의의 답변서를 받을 수 있었다. 답변의 내용은 "당사자들에게 불편한 심기를 끼친 점을 사과한다"는 것이었고, 문제제기한 글 일부를 수정하겠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입장으로서는 그동안 줄기차게 요구해온 해당기사의 삭제와 공식사과(지면과 홈페이지)에 대한 답변을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고, 또 사과한다는 것이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 불분명한 이 마지막 답변서를 받아본 후, 사실상 범민련 남측본부가 인권단체연석회의를 포함한 인권사회단체들의 요구를 거부한 것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 문제에 대한 인권단체연석회의의 입장은 위에 설명한 것과 같다. 우리는, 범민련 남측본부가 민족의 진로 해당기사를 통해서, 성소수자를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드러내보였다고 생각하며, 문제해결을 위해 인권단체들이 요구한 사항들(공식사과, 기사삭제 등)을 사실상 거부했다고 판단한다. 우리는 민족의 진로 3월호의 해당기사와 관련해 범민련 남측본부(혹은 글을 작성한 조직위원회)가 지면과 홈페이지를 통해 공식적으로 사과할 것을 다시금 요구한다.

성소수자(운동)에 대해 범민련 남측본부가 보인 입장과 태도는 한국사회 진보운동의 연대와 신뢰의 정신을 훼손시키는 처사이다. 인권단체연석회의는 이에 대해 항의의 의사를 범민련 남측본부에 전달하는 바이며, 이 문제와 관련해 앞으로 아래와 같은 입장과 태도로 임할 것임을 밝힌다.  

첫째, 인권단체연석회의는, 이 문제에 대한 운동사회 내외의 공론화를 위해, 인권단체연석회의가 연대하고 있는 모든 사회단체들과 연대활동기구에 우리의 문제의식을 알려나가고, 이 문제에 대한 적극적이며 비판적인 토론을 조직해나갈 것이다.

둘째, 인권단체연석회의는, 공대위 등 여러 연대 기구를 통해, 범민련 남측본부와 함께 진행하고 있는 연대활동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재고할 수 밖에 없음을 알린다.


2007년 9월 4일

인권단체연석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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