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5월 16일(금), 맑은 날
새만금 해창갯벌을 떠난 지 50일째인 오늘, 순례단은 수원시내를 통과했습니다. 삼보일배를 시작한 초기에는 서리가 내리고 얼음이 얼던 영하의 날씨에 천막 속에서 웅크리고 자던 기억이 생생한데, 이제는 거리의 사람들 대부분 반팔 소매옷을 입고 있으며 길가 화단에는 어느새 장미가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붉디붉은 장미꽃, 그 핏빛 꽃향기를 맡으며 계절의 변화를 실감합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5월 16일, 모레가 5월 18일입니다. 사람들은 오월을 계절의 여왕이라 하지만, 매캐한 최루탄 연기 속에서 민주화와 독재타도를 외치던 잔인한 오월의 기억도 생생합니다.
그런데 이제 저에게는 그 어떤 오월보다 2003년 오월이 가장 잔인한 달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따가운 햇살 아래 뜨겁게 달구어진 아스팔트 길 위를 엎드렸다 일어나고, 엎드렸다 또 일어나는 자벌레를 닮은 네 성직자를 두 달 가까이 지켜보는 것은 웬만큼 무딘 심장을 가졌다하더라도 참으로 잔인한 일입니다.
언제쯤 이 잔인한 구도의 행진이 끝날 것인지? 언제쯤 사람들의 마음에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이 사라질 것인지? 언제쯤 새만금갯벌의 생명들에게 생존의 희망이 보일 것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오늘 삼보일배에 참여했던 조옥진님은 "환경문제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변했으면 좋겠다. 바다를 막아 육지를 만들 정도의 힘과 능력이 있다면, 자연 그대로 두고도 다른 땅을 사용할 능력이 충분히 있을 것이다. 생각을 조금만 달리하면 될텐데"라고 안타까워하십니다.
성빈센트병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하신다는 한동화님은 "환경에 관심이 많다. 환경단체 사람들처럼 직접 나서서 활동하지는 못하지만 항상 마음만은 함께 있다. 하루라도 참여하는 것이 실천하시는 분들을 도와드리는 것"이라며 하루 종일 순례에 함께 하셨습니다.
전국농민회총연맹 전 의장이신 전국민중연대(준) 전광훈 준비위원장님은 "우리나라 제도권 정치인들이 민중들의 이해와 요구를 들으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미래지향적 사고도 가지고 있지 않다. 농민운동을 하면서 처음부터 새만금 간척사업에 반대해왔다. 갯벌을 막게되면 자연재앙만 발생할 것이다. 이 사업으로 농업생산에는 기여할 수 있겠지만 그 비용을 생각해본대면, 그리고 WTO 수입개방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는 말도 안되는 일이다. 이 사업은 농민들을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 부처의 예산을 따내고, 땅장사를 하려는 것이다"고 말씀하시며 민중연대 차원의 협력을 약속하셨습니다.
늦은 오후에는 생태경제연구회 우석훈 박사님께서 오셨는데 지금이라도 새만금 간척사업을 중단한다면 훨씬 경제성이 있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박사님께서는 간척사업을 계속 진행할 경우와 지금 중단할 경우 앞으로 100년간 얼마만큼의 비용이 소요될 것이며, 얼마만큼의 편익이 발생할 것인지 계산하셨다고 합니다. 그 결과, 농산물 생산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편익보다 수산물 생산 감소와 매립비용, 수질 개선비용 등이 더 크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중단하는 것이 전체적으로 이익이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경제성도 없으며 타당성도 없는 사업을 왜 계속 추진하려는지, 밑 빠진 독에 물만 들이붓는 일을 언제까지 할 것인지 참으로 답답합니다.
녹색평론을 발행하시는 김종철 교수님과 풀꽃평화연구소 최성각 소장님, 도서출판 풀꽃세상 정상명 대표님께서도 순례단을 찾아오셨습니다. 이분들은 "환경이 얼마나 열악한지 네 분은 몸으로 느껴 아실 것이며, 몸도 다 망가지셨을 것이다. 그동안 하신 헌신과 희생만으로도 충분하며 서울까지 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간곡히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웬만해선 네 성직자를 멈추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전북 군산의 기아특수강 노동자 네분도 오셨는데, "전북에는 큰 배가 들어올 만한 물량이 생산되지 않는다. 새만금에 아무리 큰 항구를 만들고 돈을 써봤자 소용이 없다. 기아자동차 옆에 있는 큰 공장부지도 다 채워지지도 않은 상태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북의 언론과 힘있는 자들은 새만금 간척사업을 계속해야 전북도민이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강요하고 있다"고 새만금 간척사업을 강하게 비판하셨습니다.
이외에도 차별철폐를 위한 100일 문화행진 참가자들과 가족프란체스칸 정평환위원회 수녀님들, 민주노총 경기본부 김상환 본부장님과 이양수 조직국장님, 서울환경연합 구희숙 공동의장님과 박종권 집행위원님·양장일 사무처장님 등 집행위원과 실무자 열네분, 천주섭리수녀회 수녀님들, 원불교 경기인천교구 김주원 교구장님과 조상호 사무국장님, 수원·분당·북인천·부평·부천·인천·동수원 교당 교무님과 용인 둥지골 청소년수련원 원장님, 발달장애우 재활모임인 '꿈이 있는 함터' 열한분, 실상사 서진암 함현스님, 수원 봉녕사 상일스님 등 많은 분들이 삼보일배 순례에 참여하셨습니다.
오늘 아침은 수원 버드내성당, 점심은 전북 익산 작은 자매의 집, 저녁은 천주섭리수녀회에서 각각 준비해주셨고 수원 지동성당에서는 잠자리를 내주셨습니다. 서울환경연합에서는 다기를, 충주에서 오신 강분석님은 맛있는 차와 향을 주셨고, 군산 기아특수강 노동자들은 과일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도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정리 마용운(환경운동연합)>
※순례가 한 달을 넘기면서 참여하시는 분들도 늘었는데, 삼보일배 순례에 참여하시려면 자신이 마실 물 정도는 준비해오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온 길 : 경기도 수원시 밀리오레 앞 - 지동성당(4.2km / 새만금 해창갯벌에서 261.5km)
※앞으로 갈 길 : 경기도 수원시 - 의왕시(5월 18일) - 안양시(19일) - 과천시(5월 21일) - 남태령(5월 22일) - 서울 사당동(5월 23일) - 여의도(5월 25일) - 광화문(5월 31일)
<일정은 날씨를 비롯한 여러 사정에 의해 바뀔 수 있습니다>
생명과 조화의 땅 새만금갯벌을 파괴하는 방조제 공사를 즉각 중단하라!
새만금갯벌과 온 세상의 생명·평화를 염원하는 삼보일배 순례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