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건 : 2001노1273 보안관찰법위반
피고인 : 이 화 춘
주 소 : 전북 익산시
재판장님,
위 사건에 관하여 피고는 원심의 벌금형이 부당하기에 항소재판부의 올바른 판결을 구하고저 아래와 같이 항소이유를 밝힙니다.
--- 들어가며---
"어느 날 초나라 사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부주의로 칼을 강물에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이에 그는 급히 뱃전에 금을 그어놓고는 배가 강 기슭에 닿자마자 뛰어내려 뱃전에 표시한 금을 따라 칼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배는 이미 한참이나 지나갔고 칼은 애초에 빠진 그 자리에 있는데 칼을 찾는 방법이 이와 같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는지요.
옛날의 법도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은 이미 한참이나 지나갔는데 법제는 그대로 두고 나라를 다스리려 하니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
여씨춘추의 찰금편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察今편은 이름에서 보듯 세상과 시대의 변화를 날카롭게 살펴보아 각종 법제도 이런 시세에 맞춰 바꿔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옛 풍습이나 생각에 구애받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그것은 망하는 정치라는 것입니다. 이는 누구나 다 아는 유명한 고사인데 새삼스레 이를 항소이유의 서두에 들먹이는 것은 지금 우리 현실에서 깊게 음미하고 새겨볼만한 고사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7년형이 확정되어 복역중 5년을 살고 1999년8.15 특별사면으로 출소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출소후 일주일 이내에 출소 사실을 관할 경찰서에 신고하지 않았다하여 보안관찰법 위반으로 기소되었고 2001년8월23일에 원심에서 벌금 일백만원이라는 판결을 받았는데 이는 저한테는 부당하고도 가혹하기 짝이 없는 판결이기에 그 부당함에 대해 스스로 변론하고자 합니다.
*** 보안관찰법은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법입니다.
당 사건은 결코 단순한 보안관찰법 위반 사건은 아니지만 기소나 판결에서 드러나듯이 겉으로는 출소사실 신고 의무 불이행에 대한 기소와 판결이기에 보안관찰법이 얼마나 시대에 뒤떨어지고 자체 모순을 안고 있는 법인가를 말씀드리는 것은 뒤로 미루기로 하고 먼저 출소사실 신고 의무 불이행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에 대한 신고의무 위반죄 적용은 그 구성요건이 시행령의 규정에 의해 확정되는 것으로서 법률주의 원칙의 위반 소지가 있습니다.
한 공안사범의 출소는 검찰의 지휘에 의해서 이루어지기에 출소사실은 검찰이나 경찰이나 이미 다 알고 있는바 그 검찰의 지휘를 받는 경찰에 다시 출소사실을 신고하라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맞지를 않습니다.
정황이 이러한데 여기에다 출소사실을 신고하지 않았다하여 법률주의원칙의 위반 소지가 다분한 보안관찰법 시행령을 그대로 준용한 벌금 일백만원의 판결은 저의 행위와 관련법을 심사숙고 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출소 후 저는 제 가족의 안정과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한 기초로서 동사무서에 전입신고를 하였고 새 주민등록증도 발부 받았으니 자연스럽게 행정자치부에 신고한 결과에 다름이 아니고 이로써 형식적으로나마 정부에 신고의 절차는 마친셈입니다.
저는 보안관찰법 자체를 당장 철폐되어야 할 시대에 맞지 않는 악법이라 생각하기에 저에게 적용된 일부 조항 적용의 부적합함만을 항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이번 사건에서 검찰의 기소와 원심의 판결은 보안관찰법의 제정목적에도 전혀 부합하지 않은 판결이기에 몇가지를 지적하지 않을수가 없습니다.
보안관찰법의 제정 목적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법은 "특정범죄를 범한 자에 대하여 재범의 위험성을 예방하고 건전한 사회복귀를 촉진하기 위하여 보안관찰처분을 함으로써 국가의 안전과 사회의 안녕을 유지함을 그 목적으로 한다"라고 명문화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건전한 사회복귀를 촉진하기 위함'이란 문구는 악법의 폐해를 위장하기 위한 미사여구에 불과하고 실제에 있어서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뿌리 깊은 모순과 부조리를 건드리는 정치범들을 이 사회에서 솎아내어 격리시키고 그들의 모든 활동을 위축시키는 한편 발목을 낚아채려는 덫에 다름이 아닌 것입니다.
보안관찰법의 뿌리를 일제시대 까지는 더듬지 않더라도 전신인 사회안전법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팔십년대 민주화의 큰물결에 어쩔 수 없이 사회안전법을 폐기할 수 밖에 없었지만 우리 사회의 기본모순의 근간을 건드리는 정치범들을 격리 관리하기에 더없이 유용한 도구를 아주 버릴 수는 없었기에 사회안전법과 같이 격리 수용만 다를뿐 내용에 있어서는 조금도 다름이 없는 보안관찰법으로 대체를 한 것이지요.
저와 같은 정치범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말중에 작은 감옥에서 큰감옥으로 나왔다는 말이 있는데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 법의 제정목적에서와 같이 '건전한 사회복귀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촘촘하기 하기 이를데 없는 보이지 않는 그물로 옭아매고 사소한 꼬투리를 낚아채어 기소하고 가혹하기 짝이 없는 일백만원이라는 엄청난(적어도 저의 처지에서는) 벌금을 부과하는게 아니라 오랜 구금의 공백으로 인해 무너져 버린 자활 능력을 배양시키는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전혀 그렇지를 못하고 오히려 정반대로 가고 있습니다.제가 출소하여 이년이 넘는 오늘까지 저희 가족이 겪는 정신적 피해나 스트레스는 말이나 글로서는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보안관찰처분 대상자라는 이름아래 경찰은 저의 일거수 일투족을 낱낱이 미행 감시함은 물론이려니와 밤과 낮도 가리지 않고 전화로 저의 근황을 확인하고 심지어는 제 어린 자식들을 붙잡고 저의 행적을 추궁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으며 저희 아파트 경비실은 물론 이웃집 사람들에게까지 저에 대한 감시의 손길을 뻗혀 주변사람들과 위화감을 조장함으로서 심각하게 이사를 고려해야 할 정도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경찰서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관할 파출소에서까지 담당 경찰이 '위에서 시키는 일이니 어쩔수 없다'며 주기적으로 찾아와 제 근황을 살피고 가는데, 그 담당 경찰의 말마따나 그들은 위에서 시키는 대로 어쩔 수 없이 사찰을 나오는지 모르지만 저희 가족이 겪는 고통은 공포 그 자체인 것입니다.
제가 1994년 구속 당시 수십명의 국가안전기획부 수사관들에게 개처럼 맞으며 끌려가는 모습을 어린 저의 세아이들은 목격을 했습니다.
아이들의 뇌리에 각인이 되어버린 그 모습은 아마도 죽을때까지 잊혀지지가 않을 것입니다. 순진무구한 아이들의 동심에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로 자리잡는게 너무도 당연한데 불행하게도 제 아이들에게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경찰을 보면 아이들은 금새 공포감에 휩싸여 덜덜덜 떠는 것은 물론이고 큰아이는 식은땀까지 흘릴 지경이 되는 것이지요.
제가 징역을 사는 동안에도 이러지는 않았다며 차라리 다시 교도소로 가는게 낫겠다는 아내의 분노와 절망은 부연하지 않겠습니다.
이렇듯 사생활의 침해는 물론 저희 가족의 내면 깊숙이 까지 침투해 어린아이들의 정신세계까지 파괴해버리는게 보안관찰법의 핵심 내용인 '건전한 사회복귀를 촉진하고 재범을 방지하기 위함' 이라고 보시는지요.
이건 명백히 저와 제 가족에 대한 사생활 침해는 물론 국가권력의 횡포인 것이며 벌금형 또한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저는 단언합니다.
출소후 이년이 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경찰과 검찰의 소환명령 체포 구금그리고 기소 재판등으로 저희 가족은 단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기에 안정적인 생업을 꾸린다는건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작 문제는 이 재판이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다는데 있는 것입니다. 보안관찰법이 없어지지 않는한 저는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되는데 이는 공포 그 자체인 것입니다.
이렇듯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저와 같은 사람을 꼭 이렇게 해야만이 자유민주체제가 수호되는 것인지, 자유민주체제가 그렇듯 허약한 체제인지 의아스러울 따름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이번 검찰의 기소는 행정편의 주의와 재량권 및 공권력의 남용이며 원심의 벌금형은 너무나 가혹한 판결인 것입니다.
**** 헌법에 보장된 정치 사상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국가보안법과 마찬가지로 보안관찰법도 철폐 되어야 합니다
정치권은 물론 전 사회적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는 국가보안법 개폐 분위기는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이는 분명 이 법이 잘못된 법이기 때문이 아니겠는지요.
이는 그 누구도 부인못할 명백한 사실로서 보수우익의 선봉이라고 자처하는 한나라당의 김용갑씨도 인정하는 것입니다. 백번을 양보하여 제정당시의 국내외정세와 정치상황에 부합되었던 법이라고 하더라도 지금에 와선 전혀 시대에 걸맞지 않는 법이라는 것이지요.
바로 보안관찰법의 해당범죄의 근간이 되는 국가보안법이 이미 오래전부터 유엔 인권위의 점진적폐지 권고와 함께 국내외에서 폐지의 압력에 놓여 있는 현실에서 국가보안법의 쌍생아인 보안관찰법은 이미 존립의 당위성마저 상실된거라고 봅니다.
이렇듯 국가보안법 개폐 논의가 이 법의 반통일성과 반인권성을 뒤늦게나마 인정하는 것이기에 대부분 국가보안법 출소자가 적용받는 보안관찰법도 그와 연동해서 시급히 폐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원심에서 재판장님은 '법이 살아있는한 지켜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였지만 시대에 걸맞지 않는 악법임이 명백해진 이 마당에 폐지전까지 엄격히 적용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것입니다.
저를 담당하는 경찰도 검사도 원심의 재판장까지 이 법의 시대착오성과 폐해에 대해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세계사적으로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이 악법의 작은 조항 하나에 갇혀 시대적 흐름에 동참하지 못하는게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국가보안법이 반세기가 넘도록 끈질기게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에서 보듯이 아무리 악법이라도 한번 만들어지면 이렇듯 폐지하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봉건시대에서 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폐지된 여러 악법들이 어느날 갑자기 폐지된 것이 결코 아님은 저보다 백배 더 잘 아시겠지요.
기본인권이 제대로 보장되는 선진 여러 나라들의 인권상황 또한 어느날 갑자기 위정자들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님은 물론이지요. 각 나라마다의 독특한 관습과 문화적 특성에 따라 민중들의 지난한 투쟁과 희생의 축척된 산물이라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일이듯이 우리나라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제반 악법을 철폐시키는 가장 유력한 수단은 광범위하게 그 악법을 어기는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반론의 여지가 없는 악법일지라도 국민 모두가 순응하기만 한다면 그 악법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동서 고금의 역사가 주는 교훈일 것입니다.
부연하자면 국가보안법의 피해 당사자들이 모두다 묵묵히 순응해 왔다면 그 법의 개폐논의의 진전이 오늘에 이르렀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보안관찰법의 해당 당사자들이 모두다 묵묵히 순응해 왔다면 과거의 사회안전법이 폐지되었겠습니까.
모두다 악법에 순응해 버린다면 그 법의 폐해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 법이라고 저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부단히 부딪혀 공론이 확산되어질 때만이 그 법의 허구성과 흉포성이 드러나게 되고 개폐의 논의가 일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일입니다.
광범위하게 악법을 어기는 것으로서 악법을 무력화 시켜야 된다는데 대해서 혹자들은 과격한 발상이라고 하는데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악법의 피해를 받는 당사자로서 최소한의 자기 방어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보안관찰법의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의 악법 어기기는 일부 제도권 정치인들이나 재벌 언론인 등에 비하면 작은 어김에 불과한 것입니다.
정권을 잡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정치인들, 엄청난 국세를 떼어먹고도 오히려 큰소리 치는 언론사 사주들, 나라의 경제를 결딴내고 천문학적인 외화를 외국으로 빼돌리고도 끄떡없는 재벌들이 어긴건 악법이 아닙니다.
제가 어긴건 그들이 어긴 한 나라를 유지하는데 필수 불가결한 선법이 아니라 언젠가는 반드시 철폐되어질 한시적인 악법이기에 저의 출소사실 신고의무 불이행에 대해 정형화된 위법의 잣대로만 재단하려는 것을 저는 수긍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권리와 자유의 행사에 있어, 타인의 권리와 자유에 대한 합당한 인정과 존중을 보장하고, 민주사회의 도덕, 공공질서, 일반인의 안녕을 위한 공정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만 법률이 정한 바에 따라 제한받는다" 라는 세계인권선언 29조2항은 권리의 제한에 대한 규정입니다.
개인에 대한 권력의 부당한 간섭을 거부하는 것이 인권의 기본 성격인 만큼, 인권에 대한 국가의 제한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권리의 제한은 법이라는 틀안에서 가능하지만 동시에 그 법은 개인의 권리와 자유의 행사를 본질적으로 침해하지 않는 것이라야만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권의 제한은 정의로운 법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자유민주주의를 국체로 하는 나라에서 양심이나 사상에 대해 실정법으로 단죄하는 나라는 아마 우리나라가 유일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이번 사건의 출소사실 신고의무 불이행 또한 광의에서 보면 정치적 표현의 자유에 관한 개인의 권리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보안관찰법의 실질적 목적은 정치범들의 사상의 교정, 즉 인간 내면의 양심을 국가권력이 강제적으로 교정하겠다는 것이므로 그 자체가 양심의 자유 본질을 침해하는 것입니다.
양심의 자유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의 내면적 기초가 되는 정신적 자유로서 어떠한 사상과 감정을 가지고 있던간에 그것이 내면에 머무는 한 절대적인 자유로서 제한할 수 없다는게 우리의 헌법 정신이며 국제 인권법의 규정이라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출소사실 신고의무 불이행은 저의 양심에 따른 정치적 표현인 것입니다. 이미 시의성이나 정당성은 그만두고 합법성마저 결여된 희대의 악법으로 저의 행위를 단죄하려는 것은 국가권력의 전횡이며 법을 빌린 거대한 국가적 폭력에 다름이 아닌것입니다.
**** 보안관찰법의 몇가지 위헌적 요소
1) 보안관찰법은 이미 법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의 인권이 얼마나 허무맹랑하게 유린당하고 있는가 보안관찰법 4조의 조항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처분의 구성요건을 보면 '죄를 다시 범할 위험성이 있다고 인정할 충분한 이유가 있어 재범방지를 위한 관찰이 필요한 자'라고 했는데 이것이 어떻게 구성요건이 된단 말입니까.
'위험성'이라는 개념 즉 객관적, 현실적 판단이 불가능하고 얼마든지 자의적, 독단적 해석이 가능한 소위 '불확정개념'을 핵심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는 죄형법정주의의 내용 중 명확성의 원칙에 위배되는 조항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같은 추상적인 법규정은 그것이 막연하고 불확실하다는 것만으로도 현대국가에서 '막연하기 때문에 무효'라는 법리에 따라 위헌무효라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법자체가 근본적으로 형식과 자격을 갖추지 못한 것입니다.
2) 보안관찰법은 이미 폐지된 사상전향을 여전히 강요하고 있습니다.
국가가 한 인간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옳다고 믿고 한 행위에 대한 대가로 적어도 실형이라는 가혹한 처벌을 한 것만으로도 불충분하여 생애의 전기간에 걸쳐서 그 일거수 일투족까지 권력에 의한 감시와 통제의 체계 속에 가두는 것은 어떠한 형벌이론으로도 정당화 되 수 없는 실로 가혹한 처벌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특히, 보안관찰법은 결코 제3자가 확인할 수 없는 인간의 내면적 사상을 문제삼아 지배권력의 입장과 배치된다고 파악되는 한, 일생동안 권력기관의 감시와 통제의 틀에 매어놓기에 법률의 이름을 빌린 폭력에 다름이 아닙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1997년 12월 8일 서준식씨의 보안관찰법 위헌소원 선고 결정문에서'이 법의 입법취지 및 이 법 제 4조의 규정취지는 내심의 사상을 문제로 삼는 것이 아니라, 보안관찰처분 대상자가 지니고 있는 사상 -이 법에서 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주의 사상과 공산주의 사상이 되겠습니다- 이 보안관찰 해당범죄에 관여한 경력과 그로 인한 자료내용, 출소 후의 제반 행상등에 비추어 그 내심의 영역을 벗어나 외부적인 형태로서 현저한 반사회성의 징표를 나타내고 있다고 보아 이를 위 보안관찰해당범죄를 다시 범할 위험성 유무에 관한 판단의 자료로 삼는 것이므로, 이는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였다고 할 수 없다고 하지만 스스로 사상의 문제를 지적함으로써 어떠한 객관적, 실체적인 그리고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험성의 증거를 발견할 수 없는 지배권력은 결국 인간 내심에 존재하는 사상을 그 위험성의 유일한 증거라고 강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소위 전향하지 않는 것을 유일한 원인사실로 삼고 있습니다.)
따라서 보안관찰의 핵심은 사상전향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3) 보안관찰법은 형평의 원칙에서 크게 벗어나 있습니다
헌법 제 11조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며,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따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받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안관찰법은 합리적인 기준이 없는 일반범과 사상범의 구별을 전제로 하여 사상범에게만 특히 가혹한 보안관찰 제도를 실시하는 법이기 때문에 평등권에 위배되는 법률인 것입니다.
사회보호법이 적어도 상습성이 인정되는 범죄자에게만 적용되는 데 반해 보안관찰법은 단 한 차례의 범죄만 있어도 적용되는 가혹성에다 사상범에게는 국민으로서 누려야 할 어떠한 자유조차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과 일반국민의 내심에 존재하는 진정한 민족, 민주의식까지 탄압코저 사상범을 볼모로 일반국민들의 사상의 자유, 비판의 자유를 근원적으로 박탈하는 '권력의 견제책'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특히 보안관찰처분 면제 결정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는 '준법정신의 확립'이라는 요건은 최근의 '준법서약서'의 원형으로서 어떠한 객관적 기준으로도 측정, 판단할 수 없는 순수한 내면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국가권력이 재단한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4) 보안관찰법은 이중처벌 금지, 재판을 받을 권리 등을 침해하고 있습니다
보안관찰법에서 규정하는 보안관찰은 보안처분의 일종인바, 보안처분이 행정기관의 판단에 맡겨도 좋은 경우는 그것이 형벌을 대체하는 것일 경우에 한하는데 보안관찰법은 형벌을 집행 받은 사람에게 다시 이중적으로 보안처분을 부과하기 때문에, 당연히 법원의 판결에 의하지 않고 오로지 행정기관의 자의적 판단 맡겨져 있는 보안관찰처분 절차는 헌법 제12조 제 1항의 신체의 자유, 헌법 제 27조 제 1항의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하고 있으며 헌법 제 13조 1항의 동일한 범죄에 대하여 거듭 처벌 받지 않는다는 이중처벌의 금지조항에도 명백히 위배되는 것입니다.
또 보안관찰처분의 심의, 의결하는 보안관찰처분 심의위원회라는 일종의 행정위원회에서 피 보안관찰자의 처분 결정권을 행사해 사법부관할의 원칙에도 보란듯이 위배하고 있습니다.
5) 보안관찰법은 사생활의 자유 및 거주 이전의 자유등을 침해하고 있습니다.
보안관찰법 제6조 및 제 18조 등에 의해 부과되는 각 조의 신고의무에 관한 규정은 신고 사항으로 교우관계 등의 개인의 사생활의 깊숙한 부분까지도 신고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또한 보안관찰법 시행령 제4조가 규정하고 있는 동태보고에 관한 내용도 개인의 사생활을 파악하지 않고는 행해질 수 없으며 보안관찰법 제19조 제 1항에서 지도의 내용으로 규정하고 있는 '긴밀한 접촉을 가지고 항상 그 행동 및 환경 등을 관찰하는 것'도 사생활에 대한 깊숙한 관찰을 의무지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안관찰법은 헌법 제 17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정면으로 침해하는 법률이라고 하겠습니다.
보안관찰법 제 19조 제 2항의 일정한 자와의 회합.통신의 금지, 일정한 집회 또는 시위장소의 출입금지, 특정장소에의 출석요구 등에 관한 규정은 헌법 제18조의 통신의자유, 헌법 제21조의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등 표현의 자유를 정면으로 침해하는 규정이며 피 보안관찰자가 주거지를 이전하거나 국외여행 또는 10일 이상의 국내여행을 할 경우에 신고하도록 되어 있는 보안관찰법 제 18조 제4항의 규정은 헌법 제 14조 거주, 이전의 자유를 침해하는 규정입니다.
이상과 같이 보안관찰법의 대표적인 위헌적 요소들을 몇 가지 지적해 보았습니다. 이렇듯이 법같지도 않은 악법을 그래도 법은 법이기에 반드시 지켜야 된다는 논리를 피해 당사자로서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국가권력이 공권력을 동원하여 인간의 내면세계마저 간섭 지배하고 굴종을 강요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기에 도저히 받아 들일 수가 없으며 제 자신과 가족을 지키려는 최소한의 정당방위이자 한 개인의 처절한 몸부림이기도 한 것입니다.
따라서 현존하는 실정법에 약간의 어긋남이 있을지는 모르나 우리 민족의 하나됨과 온전한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을 위해서 저의 행위는 지극히 정당하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 마치면서 ---
몇년전 베스트셀러가 되어 화제를 모았던 홍세화씨가 쓴 '파리의 택시 운전사'라는 책의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귀국을 할 수 없게 된 저자가 프랑스에 망명하려고 망명신청을 하자 사무국 관리는 "구체적인 행동도 없이 겨우 엉성한 조직을 만들고 유인물 좀 뿌렸다는 이유만으로 망명을 해야 하는가"라며 이해를 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 정도의 일 가지고 무슨 망명까지 하려느냐면서 망명신청이 허위나 과장된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끝내 버리지 않아 저자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초라하고 조국의 현실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는 술회의 대목 말입니다.
선진 여러나라의 사람들에게는 장난쯤으로 여겨지는 일들이 우리 땅에서는 목숨마저 걸어야 하는 현실을 웅변하는 대목이라 절절이 가슴에 와 닿았었습니다.
그 서슬퍼런 국가보안법조차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역사적 박물관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한세기 이전의 유물쯤으로 인식되어 지고 있는데 그 법을 근간으로 해서 만들어진 보안관찰법에 이르러서야 새삼 무슨 말이 더 필요 하겠습니까.
자유민주주의 본질은 헌법에 보장된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거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공권력의 뒤에 숨어있는 국가권력의 감시와 억압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고 싶습니다. 시대착오적이고 위헌적 요소가 가득한 보안관찰법으로 저의 자유로운 사회복귀를 막는 것은 법치국가와도 양립하지 않으며 저에 대한 형사처벌은 지난 5년의 징역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보안관찰법의 단순한 조항하나를 걸어서 또다시 저에게 벌금형을 내리는 것은 민주주의를 국체로 하는 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간곡히 말씀드리거니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이기에 지켜야 된다'는 말씀만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악법은 어기는 사람이 많아질때만이 비로서 금이가고 마침내 깨어진다는게 저의 확고한 신념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재판부의 결단, 소신 있는 판결이 맞물릴 때 악법의 운명은 다 하는거라 저는 믿고 있으며 역사적 고비마다 왕왕 그런 빛나는 판결이 있었슴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저는 요즘 기도지향을 사법부에 두고 있습니다. 사법부에 용기와 희망이 충만하라고 말입니다.(저는 출소후에 가톨릭에 귀의했고 영세와 견진까지 받았습니다)
또한 사법부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법부는 개인의 권리 즉 인권에 대한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인데 열린 사회에서 소시민으로 자유를 만끽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사건의 본질을 바로 살펴 올바른 결정을 내려주시기를 기대하면서 항소이유를 가름합니다.
2001 . 9 . 27
피고 : 이 화 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