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 정규직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2)
나무(KT 민주동지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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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 안에서는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사측의 노동자 인권 침해, 이에 대응해 전북평화와인권연대에서는 KT의 노동자들과 함께 매주 1인 시위, 촛불문화제 등을 진행해오고 있습니다.  KT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를 통해 회사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권침해, 노동탄압 그리고 노동자들이 그에 맞서서 싸워온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합니다. 지난 소식지에 이어 나무의 ‘KT 정규직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을 싣습니다. 앞의 글은 전북평화와인권연대 홈페이지(http://onespark.or.kr) <인권소식> 게시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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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파견법이 통과하고 6개 직종 중 교환직이 들어있다는 이유로 KT는 28%의 정규직과 72%의 비정규직으로 이뤄졌던 114 아웃소싱을 선언하였다. 서울 114를 중심으로 전국 114가 조직되어 분당 본사 로비에서 농성이 들어갔다. KT와 다수의 남성 조합원들은 무식한 여자들, 하는 일업이 월급만 축내므로 내보내야한다, 너희가 나가야 우리가 산다, 남편들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편하게 살라는 등 분사 당위성을 주장하기위해 사내 게시판에 도배를 한 말들이다.

빼돌려진 내 자리 PC와 열쇠, 노동자간의 갈등
분당 본사에서 46일간 농성을 함께하고 살아 돌아온 전북 조합원이 36명,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KT노조 사무실로도 못가고 민주노총 소회의실로 모였었다. 1차 징계에서 내가 해고되자 100만원의 투쟁성금을 만들어 살아온 12명의 젊은 조합원들이 찾아왔지만 현장으로 돌아간 그들은 내 안부 전화조차 부담스러워하고 내가 징계가 감경되어 현장에 돌아와 사내에서 마주쳐도 외면하고 눈인사조차 나누려 하지 않았다. 자신들은 젊어서 오래 다녀야하기에 KT 눈 밖에 나면 안 되고 다 죽어도 자신은 살아야하기에 우리와 가까이 할 수 없다며 노골적으로 함께 살아온 나이든 언니들을 부담스러워하고 탄압하는 사측과 어용노조 후보들과 선거 운동하던, 함께 46일 농성하고 살아온 젊은 여성 조합원들.

2002년 2차 징계에서 정직으로 감경되어 현장으로 돌아오자 나와 가장 친했던 여성 조합원이 내 PC를 가지고 주지 않는다. 자신은 PC가 2대가 필요하고 내 책상 열쇠는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한 달 가까이를 빈 책상에 왔다가 퇴근 하는 일을 반복하였다. 업무 배정했는데 업무처리 안한다는 과장 말에 친했던 그 어린 여성조합원과 내 PC와 책상 키 달라고 대판 싸웠다. 그 여성 조합원은 울면서 ‘언니는 왜 나와 지난여름 선암사 놀러간 사진들을 회사에 들켰느냐’고 했다. 난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나와 친하지 않다고 증명하기 위해 나를 탄압하는 회사의 선봉에 서있는 이유를. KT내에서 여성 관리자로 성장 해보고자하는 꿈을 가졌던 총명하고 업무능력이 뛰어났던 그녀를 난 용서했다.

PCS 강매, 사측의 미행과 감시, 상품판매팀 투쟁과 산재 승소
일인당 PCS 10대씩을 팔라는 강매가 수시로 이루어졌던 한 해. 핸드폰이 책상마다 수북이 쌓여있고 본인들이 신청서를 작성할 것도 없이 알아서 핸드폰이 개통되어 책상으로 배달되어 와 있었다. 일명 자뻑이다. 두 명의 타도 조합원이 강매의 압박으로 자살하고 힘없는 조합원들은 웃돈 줘서 팔고 시달릴 때 회사와 노조는 ‘현대자동차는 조합원들이 자동차도 판다. 우리는 자동차가 아니고 핸드폰인 것이 다행인 줄 알라’였다.
일등을 해야 한다는 압력에 KT직원 한명이 1354대를 자신의 집에 가개통 놓은 사실을 조태욱 동지가 인터넷 신문에 제보하면서 강제 PCS판매가 중단되었고 조태욱 동지는 해고되었다.

또 다시 노조 선거에서 지고 114투쟁 후 살아 돌아온 여성조합원들과 민주동지회 동지들 일부를 상품판매 전담팀이라며 전국적으로 발령을 내고 PC도 자료도 없이 무조건 길거리 나가서 상품판매 해오라 강요하였다. 군산에서 우리 동지들을 미행하는 차를 잡고 보니 노사팀 놈들. 하루 일지를 작성하게 하고 매일매일 판매량을 점검하고 업무 부진자라고 사유서 작성하게 하고 업무 능력 테스트한다고 말도 안되는 시험을 보게 하고 동료들 앞에서 무능한 인간이라고 창피주면서 퇴직을 강요하더니 나이든 여성 조합원 한명을 매일 매시간 뒤따라다니며 감시하고 사진 촬영했던 자료들을 내 놓고 근무 불량이라며 해고 시켰다.

지역동지들과 함께 했던 상품판매팀 싸움. 내가 처음 인권연대라는 것을 알았던 시기이다. 싸움이 시작되자 매일 이어지던 미행 감시가 전국적으로 뚝 끊겼다. 대구에서 매일 따라다니던 감사실 놈들이 며칠 전부터 안보인다며 이상하다고 전화가 왔다. 대법원까지 올라가 승소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미행 감시에 의한 산재승인.

내가 아무리 업무를 잘해도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동료들
출퇴근 불가능토록 부당 발령 내놓고 내게 하던 회유와 협박, 현 어용노조에서 간부를 해주고 협조를 해주면 발령도 원복 시켜주고 나와 내 남편도 승진시켜주겠다는 제안. 계속 내가 거절하자 관리자들은 자기들이 힘이 있으니 끝까지 이지역저지역 발령을 내어 가정생활을 못하도록 만들겠다고 했다. 6년 동안 이어진 감봉. 명퇴시마다 친절하게 정보를 알려준다며 권하던 퇴직. 날 사랑한다고 오밤중에 집으로 전화질 하던 과장 놈, 남편에게 내 대신 사표 써달라고 찾아간 부장 놈, 파업에 가지 말라며 밤중에 집으로 찾아온 부장 놈과 앞잡이 놈. 관리자들과 진하게 미팅하자던 미친 과장 년. 다른 사원들은 당연히 하는 근속 승진을 우리 민주동지회 동지들에겐 4년 5년씩 못하게 매년 D등급을 주어 업무 부진자를 만들어 승진을 탈락시켰고 노동부도 KT편을 들었지만 지난해 처음으로 노동부에서 조태욱 동지가 승리하였다. 실로 10년만이다.

한때 내 옆 동료들은 내가 업무를 잘하고 상품판매를 아무리 잘해도 부당한 대우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과중하고 어려운 업무는 다 내가해야하고 내 대신 해외여행을 가든 포상을 받든 당연히 내가 아니고 자신들이 차지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난 그런 조합원들을 만날 때 마다 토론을 붙었다. ‘나도 힘들고 괴롭다. 누가 잘못되었는가? 회사가 눈이 있나 회사가 나를 어떻게 찍을 수 있냐, 모두 사람이 하는 것이다, 가까이 있는 당신들이 나를 핍박하는 것이지 멀리 있는 국장, 본부장들이 하는 것이 아니다. 누가 더 KT와 사람들을 아끼냐’고.

사내의 정보유출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PC는 실시간 감시되고 자신의 업무와 관련되지 않은 문서들은 볼 수가 없다. KT전반적으로 어찌 돌아가는 지는 일반사원들은 알 수 없고 문서 열람도 직위에 따라 볼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구분하였다. 우리는 단 내 분야만 알고 시키는대로 아무 생각없이 기계처럼 일만 반복 해야하는 것이다. 자본은 인간의 개별화 파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사람이 어울려 함께 만들어가는 인간중심의 직장문화라는 구호가 아까울 지경이다.  매주 두 번씩 이뤄지는 상품 많이 팔라는 정신교육.

저들은 우리의 사고와 영혼마저도 자신들의 입맛에 맡게 길들이려한다. 지난주 서신동 KT앞 촛불 집회 후 상품판매 저조한 사원 10%는 징계하고 타도 발령낸다는 문서가 사내 게시판에 있었는데 사라졌다. 연령 등을 이유로 명퇴 강요 잦은 면담도 좀 잠잠하다.

갈등하고 고민했던 나의 저항의 길에 후회는 없어
우리가 스스로 저항하지 않으면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나는 무조건 싸우고자하는 것이 아니다. 나도 사람이므로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인정해달라는 것이고 나도 인간으로서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측의 압박과 탄압은 내 인생을 깊이 있게 했고 내게 주었던 고통은 내가 세상을 보는 안목과 시야를 넓혀줬다. 함께 했던 동지들이 떠났어도 자본과 권력에 밀착되어 사측의 앞잡이가 되고 노조활동을 이용해 해외 여행가고 월급 올리고 승진한 자들을 용서해 본 적 없지만 싸우기가 힘들어 포기하고 사측에 붙지도 못하고 우리와도 멀리하며 겸연쩍어하는 옛 동지들에게 무한한 애정을 끊어 본 적이 없다.

비록 더디 왔고 늦게 깨달았으며 성품은 나약하고 우유부단해 늘 갈등하고 고민했지만 저들에게 저항해온 내 삶을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으며 자본에 질질 끌려 다니지 않고 내 두 발로 꿋꿋하게 설 수 있도록 만들어준 수많은 내 동지들에게 감사한다. 그들이 함께 해주어 지금의 내 삶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