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 그 길의 끝은 어디입니까?
김종섭(전북평화와인권연대 운영위원장)
오랜만에 평화동성당에 들러서야 단식 한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잠시 쉬어가시나 싶더니만 기어이 몸을 던지신 것이다. 오체투지 기도순례를 마친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고, 젊은 사제들에게 양보하라는 아우성에“죽어간 사람과 그 처자식 고통만 하겠느냐”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신다. 형님 신부의 걱정도 마다하고 이미 용산, 그곳에 육신과 영혼이 자리 잡고 있는 신부님에게 더 이상의 걱정은 큰 역성으로 돌아올 것을 아는 터라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밥 한술 걷어 먹이겠다며 내 앞에 앉아 식사가 다 끝날 때가지 묵묵히 바라보는 신부님의 눈을 피해 허기 달래느라 혼이 났다. 그 후 며칠이 지나서 쓰러지셨다는 소식에 마음이 무겁다 못해 시커멓다.
분명 쾌차 하실 거라는 굳은 믿음, 그리고 순간 로마 우르반 대학 대강당의‘그리고 그 다음은..’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출세와 권력의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말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신부님에게는 가장 낮은 곳, 연약하고 힘겨운 곳, 사람과 자연이 아우성치는 곳, 용서와 화해가 있는 곳을 향한 쉼 없는 발걸음이다. 이제 예순이 훌쩍 넘으셨는데 힘겨웠던 병상에서 일어나 그리고 그 다음의 길을 찾아 나설 신부님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울컥한다.
돌이켜보면 쉼 없이, 독하게 결단했던 신부님이다. 말이 오체투지, 삼보일배지 그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이다. 예측하기 힘든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과 사회적 통념을 넘어서는 행동은 당신의 말씀대로 인간개인이 아닌 사제로서의 사명 이외에는 달리 설명이 안된다.
당신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남과 북의 분단의 경계를 넘어서고, 새만금의 생명을 파괴하는 탐욕의 개발이 뭇 생명을 이겨내려는 그 순간에 부안 해창갯벌에서 서울까지 65일 동안 3번걷고 1번 절하며 갔다. 얼마 전 에는 모든 분들이 붙잡고 붙잡아도 모든 생명에게 희망의 용기를 주겠다며 삼보일배 보다 더 낮은 자세로 124일 오체투지 기도순례 길을 재촉했다. 무사히 지나 온 길이 함께 길을 걸어간 이웃들의 사랑과 기도 덕이라 했지만 당신의 말씀처럼‘이러다가 길에서 죽을 수 있겠구나’라고 느낄 정도의 힘겨운 고통을 다 받아 내신 것이다.
그렇다고 그 많던 역사적 일들을 스스로의 힘으로만 결단한 것은 아니다. 스스로 고백하는 것처럼 분단과 통일에 대한 관심과 행동은 조국통일을 외치며 할복 투신한 고 조성만 열사의 죽음 앞에 자신의 무지를 속죄하는 것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새만금 생명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당시 생태적 삶을 고민했던 청년들의 새만금 순례에 참여하면서 안내 되었다고 한다. 항상 마음의 준비는 했겠지만 그냥 스쳐 지나는 인연들을 마음으로 경청하고 나누면서 자신의 길을 사색하며 커다란 결단을 하신 것이다. 그러니 사람 만나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을 얼마나 좋아 하시겠는가?
하지만 일이 시작되면 진자리만 고집하며 참 꼬장꼬장 하시다. 낯내는 자리, 그냥 존재감으로 초청되는 자리, 어른만으로 모셔지는 자리와 조직들에 대해서는 손 사레를 친다. 이유는 간단하다. 참여한 사람들을 타박하지 않으면서도 굳이 당신이 아니어도 되는 자리라는 것이다. 무심히 넘어가면 그만인 것을 참 꼬장꼬장하다고 한다.
우리 같은 젊은이들 꾸짖는 대목도 어찌 보면 매 한가지이다. 남의 고통 안중에도 없고 모르는 척 넘어가려고 할 때, 자기 밥그릇 챙겨놓고 손잡아 주려고 할 때 어찌 아시는지 딱 걸려서 잔뜩 꾸지람을 하신다.“이웃의 손을 잡고자 한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놓을 각오가 있어야한다’며 자신에게 득이 되려고, 무엇을 얻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의 것을 다 주려고 할 때 비로소 공존하고 함께 할 수 있단다. 항상 이런 신념이니 일을 시작할 때 단식이든 순례든 자신을 다 내어놓고 시작한 것이 아닌가?
용산참사 재판부가 철거민들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신부님은 진실을 외면한 역사가 어떻게 극복되었는지 숱하게 보았더라도 여러 사람들의 고통을 생각하며 함께 눈물 흘릴 것이다. 낮은 이웃들의 그 고통, 나에게 주시라며 눈물의 기도를 올릴 것이다. 하지만 신부님은 오늘도 비통함을 넘어 가장 좋아한다는“너 어디 있느냐?”는 성서의 가르침을 성찰하실지 모른다.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 제 아픈 몸 마다하지 않을 그 길에 많은 사람들이 잠시나마 이웃과 벗이 되어주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