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 정규직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
나무(KT 민주동지회 회원)


KT 안에서는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사측에 노동자 인권 침해, 이에 대응해 전북평화와인권연대에서는 KT의 노동자들과 함께 매주 1인 시위, 촛불문화제 등을 진행해오고 있습니다. 이번 소식지에는 KT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를 통해 회사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권침해, 노동탄압 그리고 노동자들이 그에 맞서서 싸워온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합니다. 한국통신 시절부터 지금까지 회사로부터 숱하게 겪어왔던 일들을 기억을 더듬어 적어주신 글을 다음 소식지까지 두 번에 나눠 실을 예정입니다.


2009년 정관까지 바꿔가며 취임한 이석채 사장은 주주 총회장에서 인위적 구조조정은 없다고 약속했지만 언론에는 연간 인건비 1000억씩을 줄여 가겠다고 선언하였다.

KT는 봄부터 일 년 내내  슬금슬금 한 사람씩 불러다가 명퇴 강요를 하더니 연말이 다가오자 ‘몇 년생 이상은 모두 나가야한다’, ‘몇 년도 입사자는 모두 퇴직 대상이다’, ‘어느 지사는 퇴직대상자가 몇 명인데 목표 달성했는데 우리만 못 했다더라’, ‘목표를 못 채우면 한 살 더 적은 사람들 까지 대상을 삼아 명퇴 강요 면담을 한다더라’ 등 별별 말이 다 돌고 있다. 상품판매 강요만 할당량을 주는 것이 아니라 명퇴대상자도 선정하고 목표를 주고 달성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문자로 잘려 나가는 비정규직 상황들도 있는데 명퇴는 행복한 줄 알라고 일침 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KT에 27년 몸담고 14년 동안 현장 투쟁을 해오면서 나는 많은 슬픔과 절망을 맛보았다. 특히 사람을 더 이상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짓을 노조의 묵인과 함께 일하던 KT의 사주로 동료들이 앞장 설 때의 살 떨리는 절망감이란. 20여년을 넘게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들 보냈던 가장 가까운 동료가 나서서 퇴직을 권하고 매일 팀장, 부장, 지사장들이 불러 퇴직을 강요하는 것을 보면 도대체 저들은 우리를 사람으로 보는가라는 물음이 끝도 없이 든다.

나는 93년 겨울 처음 머리띠란 것을 전북대 학생회관에서 묶어보았다. 그 후 불같이 일어났던 5만 조합원의 한통 노조가 정권의 탄압과 사측의 공작으로 기울어 갈 때 지역 집회에서 채증한 사진으로 나를 부당 발령을 내고 오히려 일벌백계하겠다고 큰 소리 쳤던 내 상관과 그러게 몸조심 해야지라며 당연시하던 내 동료들, 자랑스럽게 자기가 사진 찍었다고 떠벌리던 내 동료. 아무 일 없던 듯이 가만히 있으면 원복 시켜주고 앞으로 회사 생활 내내 근무상황들을 다 봐주겠다고 여러 관리자가 와서 회유했지만 난 그들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일 년을 싸워 원복하고 내 업무로 돌아왔지만, 그때부터 아무도 나와는 아침 커피도 안마셨고 구내식당에 점심을 먹으러가는 것도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자꾸 꺼려하는 동료들을 보았다. 내 옆자리에 앉아 나와 가까워진 모든 동료들은 수시로 자리 재배치를 받았다. 모두가 몸사리고 노조가 무너져 갈 때 감옥가고 해고된 동지들을 생각하면 가슴 아파서 뭔가 작은 것이라도 함께 하겠다고 시작한 노조 간부 활동이었다.

설마 당신도? 노동자끼리 감시, 협박에 노조의 어용화
99년 조합선거에서 원병희 동지는 전주지부장 후보로 등록하였고 사측의 협박으로 선대본 조차 제대로 세워보지 못하고 후보 수행원들까지 모두 협박하여 홀로 전주지부장 선거에 임하였지만 패하였다. 조합원 420여명 회사로부터 물적 인적을 대거 지원 받은 사측 후보와 대결에서 7표차로 낙선하였고 우리는 노조 집행부를 어용노조에 내놓아야했다. 난 그때 사측 앞잡이들의 모임이 있는데 당시 모부장의 대학 선후배 및 중고 선후배들 그리고 과별로 차출된 몇몇의 사원들로 이루어졌고 노조선거를 앞두고 회식하는 자리에서 만나 ‘설마 당신도?’라며 서로 놀랐다는 애기를 들었다. 설마 당신도?

선거가 끝나자마자 이취임도 하기 전에 치러진 퇴직금 누진제 폐지 조합원 찬반 투표. 투표소 설치를 거부하고 우리가 싸우자 사측의 앞잡이들이 투표용지를 들고 다니며 조합원들에게 자신들의 책상에서 찬반을 찍으라하고 대 봉투에 담아갔다. 소리치고 욕하고 싸우고 무효 만들었지만 회사와 짠 노조 선관위는 투표율과 찬성률을 3번씩이나 수정해가며 퇴직금 누진제가 폐지되었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뿔뿔이 흩어져 원거리 출퇴근 비연고지로 발령이 났다. 지방노동위원회 승소로 다시 원복했지만 원병희 동지는 또 다시 비연고지 발령을 받았다. 그리고 가정 파탄자, 인격 파괴자, 정치인등 별의별 해괴한 소문들을 다 만들어 돌렸다.

사측의 치밀한 노사 관리는 5호 담당제를 방불케했다. 누가 누구를 감시하는지 몰라 지들도 몸 사리고 말조심하면서 회사에서 보내주는 해외여행, 승진, 편한 업무에 길들여간 앞잡이들. 나와 커피를 마시거나 잡담을 나눴거나 점심을 같이 한 조합원들은 퇴근하면 여지없이 회사는 그들과 가장 가까운 동료를 통해 너를 걱정해서 전화한다며 왜 같이 밥먹고 다니냐,  언제부터 친한 사이였냐, 무슨 말을 하더냐, 너도 특별관리 당하고 싶냐 등 회사가 주시하고 있으니 같이 다니지 말고 아니면 너도 강성으로 분류된다며 주의와 경고성 협박을 함께 받았다. 나를 두둔하던 조합원들은 여지없이 본인과 가장 적성에 안 맞는 곳으로 발령을 내고 그들을 감시하고 은근히 협박하고 작은 업무 오류만 나도 훈시와 사유서 제출을 요구받았다. 너무 견디기 힘들다는 전화가 걸려오면 그 목이 잠긴 목소리에 함께 울었다.

여성 노동자에게 가해지는 퇴직 강요, 부당 발령
2000년 30대 후반이었던 내가 첫 명퇴 강요면담을 받았다. 부부사원이니 퇴직하라고 내게 전화하더니 부장이 내 남편에게 찾아가 사표를 쓰게 하든지 대신 사표를 써달라 했다. 나와 내 남편의 강한 항의를 받고 물러섰지만 저녁에 집에 까지 찾아와서 문 두드리던 부장과 앞잡이 놈. 날마다 울면서 불려 다니던 여성 조합원들. 나이 먹었다, 부부 사원이다, 회사가 어려운데 집안의 가장인 남자를 내보낼 수 없잖느냐, 남편이 벌어온 돈으로 편안하게 집에서 살림이나 하라 등 아침 출근하여 근무복 입으면서부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여 하루에 면담 두어 번 씩하면서 진을 빼고 숨죽여 울던 여성 조합원들. 네 남편이 얼마나 무능하면 너보고 돈 벌어오라하냐, 부부사원에게는 남편 승진 못한다, 회사 내에서 네 남편은 끝난 거다 등 온갖 협박 속에 사표 쓰고 나가야했던 여성 조합원들의 울음소리를 노조는 못 본 척 못들은 척하면서 오히려 퇴직을 독려하였다.

아내가 사표 내지 않은 모든 남성 조합원들은 비보직 비연고지 발령이 났다. 특히 본사를 중심으로. 그 악랄한 탄압의 고리를 명동성당 파업으로 끊었다. 눈이 펄펄 날리고 강추위가 엄습하던 밤, 조합원들의 저녁이나 침낭은 전혀 준비가 안되어 있었다. 명동성당 마당이라 불도 피우지 못하고, 가까운 지물포에서 사온 얇은 비닐 하나로 눈보라 막고 앉아 새벽까지 이어진 문화제. 명동성당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을 축하한다는 현수막을 내걸고 있었지만 우리에게 파업대오를 해산하고 명동성당을 나가달라는 방송을 수시로 하였다. 펄펄 날리던 눈발들과 명동성당의 아름다운 종소리, 너무 추워 마리아상 앞에 켜있는 촛불에 손을 녹이다 불경죄로 혼났던 나. 명퇴강요를 회사가 철회하고 부당발령 났던 조합원들이 원복되고 우리는 현장으로 돌아왔다.

싸우는 노동자와 친하게 지내면 어김없이 가해지는 불이익
파업참여 조합원 징계와 더불어 파업을 많이 참여한 지역본부와 전화국은 승진 티오를 줄이고 예산도 줄인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나마 남은 몇 안되는 민주노조 지역 본부마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파업 현장으로 내게 옷가지를 보내줬던 여성 조합원은 비 연고지 발령이 났다. 파업현장에서 노조 간부가 택배를 받아 전달했는데 사측에 밀고한 것이다. 부당발령이라고 항의하는 나에게 그 부서가 아웃소싱돼서  발령냈다고 주장했지만 두 사람만 비연고지 발령내고 나머지 조합원들은 전주에 그대로 다 남았다. 더더구나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함께 발령냈던 그 여직원은 보란듯이 15일만에 다시 전주로 원복시키고 내게 옷을 보내줬던 조합원은 아직도 전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장거리 출퇴근을 하고 있으며 매년 퇴직 강요와 D등급을 줘 업무 부진자로 분류하고 있다. 그리고 상관이 바뀔 때마다 그녀에게 꼭 물어보는 첫마디는 아직도 그 사람이랑 친해? 우리는 친한 사이가 아니었었다. (다음 소식지에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