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시간은 거꾸로 가는가?
리다지디(전북평화와인권연대 회원)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 연상한 제목 '인류의 시간도 거꾸로 가는건가?’ 영화는 내게 인간에게 탄생과 죽음이 하나의 일관된 연관성을 같고 동일하게 흐르고 있다는 느낌을 전한다. 그 출발이 처음이든, 끝에서든 결국 만나는 지점은 죽음과 존재의 유한함... 아마도 인류의 시간 역시 전쟁과 환경파괴와 같은 회복할 수 없는 치명적인 상처와 과오로 인해 이미 거꾸로 회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존재란 그렇게 유한함을 향해 생명이 다 할 때까지 존재의 끝을 향해 내달려 가는 것이 영원한 운명인지도...
얼마 전 내가 일하는 공간에서 <지구>와<북극의 눈물>이라는 다큐영화를 함께 일하는 이들과 사무실 집기를 이용해 감상과 토론을 나눈 적이 있었다. 10년이라는 제작과정을 거쳐 <지구>라는 한편의 실화는 존재 자체의 신비로움 속에 지구라는 단 하나의 별 안에서 펼쳐지는 위대하고 경이로운 생명의 우주를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은 인간과는 무관하게 존재하고 숨 쉬는 이 대지와 생태계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과정을 인간이 개입하면서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를 더 구체적이고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는 것이 <북극의 눈물>인 것 같다.
이런 현상을 보면 문득 ‘벤자민 버튼의 시간’처럼 인류의 시간 역시 거꾸로 흐르는 것만 같다. 어쩌면 그것이 생의 숙명일지도 모를 서서히 죽음을 향해 운명을 다하는 인류의 시간. 그러나 그것이 결코 숙명으로 자연스럽게 인정되기 어려운 것은 불행한 미래를 자초하며 생태계와 인간사회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과 전쟁이 새로운 시도와 가능성마저 소멸시켜 버린다는 것이다. 탄생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그 죽음은 더 나은 탄생과 미래를 항해해 가는 것이 인류의 역사였다.
간혹 인류의 종말이나 지구 생태계 멸종에 대해 심심치 않게 농반진반 입담이 오고간다. 지구라는 행성에 기생하는 하나의 생명체에 불과한 인간의 역사는 개발과 산업화라는 미명하에 자행되어진 수많은 파괴가 부메랑처럼 돌아와 이제는 인간을 위협하고 있는 시대를 만나고 있다. 아마도 5년이라는 시간 안에 북극은 없어져 버릴지도 모른다고 한다.
먹이를 잡을 기운도, 정작 먹이조차 찾기 어려워 녹아내린 빙판아래 텁썩 쓰러져 결국 풀이라도 뜯다 지쳐버린 비쩍 마른 북극곰의 모습이 어떻게 회복될 수 있을지 암담하기만 하다. 생태계와 자연을 극복하며 생존해오던 인간의 존재가 적이 아닌 대안이 될 수는 없는 것인가. 중국의 차와 티벳의 말을 교역하던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교역로 ‘차마고도’의 마방처럼 아무리 갈 길이 멀고 험난해도 말과 자신이 하나이듯 함께 생존해왔던 역사처럼.
인간에게는 다행히 끝없이 스스로의 부족한 것을 갈망하고 채우려는 욕망이 존재한다. 그것을 철학사에서는 자각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 자각이 있었기에 인간의 역사는 사랑이 작동하고 결핍을 해소하려는 인간 영혼의 내적이고 자발적인 활동성을 만들어 왔다. 지구환경과 생존의 문제 역시도 다시 한 번 인간 스스로의 자각으로 새로운 희망과 비전을 찾아갈 수 있길 기대해 보며 희망을 잃지 않는 오늘을 살아갈 책임과 권리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김질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