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희 / 가톨릭 노동사목 익산노동자의집 소장

내가 그를 만난건 작년 여름 필리핀 노동자들과 함께 한 물놀이였다. 필리핀 친구들 중 그는 유난히 눈에 띄었다. 아마 준수한 외모 때문이었으리라. 맥없이 웃던 그 얼굴을 그 후 일요일 저녁 미사에서 몇 번 봤다. 그리고 겨울이 지나면서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었다. 다른 필리핀 친구들에게 그에 대해 묻지 않았다. 다만 짐작만 할 뿐. 그렇게 사라진 그를 다시 만난 건 노동자의 집이다.
서울에 계신 필리핀 신부님에게 전화를 받았다. “임금을 못받은 필리핀 노동자가 있어요. 노동부에 진정서를 접수시켰어요. 익산 노동부에서 출석통지를 받았는데 혼자가는건 어려울 것 같아요. 같이 가줄 수 있어요?” 그렇게 서울에게 기차를 타고 내려온 그 노동자는 롤란도였다. 역시 그가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예상대로였다.

추방을 면하기 위해 사라졌던 '롤란도'
롤란도는 2000년 1월 14일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왔다. 2002년 1월 14일로 2년간의 산업연수가 끝나고 그 후 1년을 연장하여 노동자신분으로 일했다. 그 기간이 2003년 1월 14일이면 끝난다. 1월 15일, 바로 다음날이면 롤란도는 한국을 떠나야 한다. 2002년 12월 15일 새벽, 롤란도는 기숙사를 떠났다.
그렇게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롤란도는 12월의 임금과 회사에서 매달 10만원씩 떼어 저축해놓은 돈 백육십만원을 받으러 왔다. 같이 노동부에 가서 조사를 받았다. 같이 회사에 갔다. 체불된 임금과 적립금을 모두 받았다. 롤란도가 웃는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물었다.“돈 많이 벌었어요?” 고개를 젓는다. “없어요. 모두 필리핀으로 보냈어요”
이주노동자들은 2년은 연수생으로 1년은 노동자로 총 3년 정도 한국에서 일을 할 수 있다. 1년 동안 벌은 돈은 거의 한국에 들어올 때 들어간 송출비용을 갚는다. 나머지 2년 동안 번 돈은 고국의 가족에게 생활비로 동생들의 학비로 보낼 수 있다. 그렇게 3년을 일하고 들어가도 필리핀에는 일자리가 없다. 위험을 감수하고 고생을 감수하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감수하고 최대한 한국에 남아 돈을 버는 이유다.
계약만료를 일주일 혹은 보름, 한 달 정도씩을 남겨놓고 야밤에 또는 새벽에 짐을 싸는 친구들은 롤란도만이 아니다.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그렇게 공장을 떠난다. 산업연수공장을 배치받고 조건이 너무 열악해서 혹은 폭언이나 폭행이 너무 심해서 사업장을 이탈해 불법체류자가 되는 경우도 많다.

불법체류자 양산하는 산업연수생제도
이러저러한 이유로 현재 이주노동자들 중 80%가 불법체류자 신분이 되는 것은 산업연수생제도의 모순 때문이다.
연수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첫째, 연수생은 사업장 이동의 자유가 없다. 모든 노동조건의 열쇠를 사장이 쥐고 있다. 임금, 대우, 해고의 권한도 물론 해고되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당연히 노동3권은 꿈도 꿀 수 없다. 내가 아는 상식으로 사업장 이동의 자유가 없는 것은 노예에 다름 아니다.
둘째, 연수생은 노동법의 적용을 받지 못한다. 실제는 노동자인데 문서에서는 노동법 적용이 안되는 연수생이다. 연수가 목적이라면 숙련자를 기술자로 양성하는데 드는 시간은 최대 6개월 정도면 된다. 연수기간이 1-2년이라고 얘기하는 건 노동권은 깡그리 무시하고 저임금으로 부려먹겠다는 것으로 밖에는 해석할 수 없다. 우스운 상황은 불법체류 노동자는 노동법을 적용받는데 연수생은 노동법을 적용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연수생 신분일 때는 최저임금 이하다. 불법체류 노동자일 때는 최저임금은 적용 받는다.
셋째 송출비용이다. 송출비용이 수 백에서 천만원 가량 든다. 저축을 해서 몫돈을 만들어서 가는건 꿈도 못꾼다.

이주노동자들에게 정당하게 일할 권리를
  현재 이주노동자들에게 발생하는 문제는 민간단체나 종교기관 혹은 마음씨 착한 사람이 감당하고 있다. 질병의 문제부터 결혼, 출산, 교육의 문제까지 이주노동자도 아프면 치료받고, 만나서 사랑하고, 힘들면 술도 마시고 싶은 욕구가 있는 사람이다.
산업연수제도는 아무 말 없이 주면 주는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저임금에 12시간 막교대, 철야의 장시간노동을 하는 '노예'를 관리하는 제도 이상이 아니다.
현재 고용허가제에 관한 논란이 한창이다. 노동허가제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산업연수제도를 폐지하고 불법이 합법을 전도하는 지금의 제도를 개선하는 첫걸음으로 고용허가제라도 실시해야한다.
이미 이주노동자들은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직장의 동료로, 옆집의 다정한 이웃으로, 같은 수퍼마켓을 이용하고, 같은 거리를 거니는 가까운 이웃으로 말이다. 이웃의 어려움에 눈뜨는 나, 그리고 우리가 될 때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좀더 가까이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