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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장, 국가의 의무를!
- 낙태죄 판결 이후, 어제는 지속되고 있다.

박슬기(언니들의 병원놀이, 회원)

  4월 11일.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이 내려졌다. 산부인과 의사인 나는 이날 오전에만 임신확인을 위해 내원한 두 명의 비혼여성을 만났고, SNS에는 임신테스트기에 두 줄이 나왔다며 도움을 구하는 익명의 여성에게로부터 메시지가 와 있었다. 판결 발표를 듣고, 가장 먼저 덮쳐온 것은 이들의 얼굴과 겹쳐지는 기억들이었다. 그동안 원하지 않는 임신을 내 앞에서 확인시키고, 도움을 줄 수 없다고 밀어낼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얼굴들. 이렇게 말도 안되는 (헌법불합치) 법 조항으로, 말도 안되게 고통받아온 여성들 한 명 한 명의 모든 순간들. 2012년 낙태죄 합헌 판결 이후 7년, 바로 오늘까지. 그럴 필요조차 없었던 모든 여성들의 고통이 새삼 북받쳤다.   

  그럼에도 이것은 승리다. 결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며, 여성들의 힘으로 쟁취해 낸 결과다. 새로운 세상을 위한 이 단 한걸음을 떼기 위해 긴 시간 달려온 사람들. 앞서 길을 닦아내고 지켜섰던 이들과, 그 길을 가득 메워 함께 걸어온 우리 곁의 모든 여성들에게 온 마음으로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이제, 진짜 싸움이 시작되었다. 

하나. 안전한 의료를 보장받을 권리
  무엇보다 가장 시급히 보장되어야 할 것은 안전한 임신중지에 대한 의료권이다. 훈련받은 의료인에게서 합법적이고 정확하게 시술된다면 인공유산은 내시경이나 치과치료보다도 더 안전한 시술임이 증명된 바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지 못하여 ‘안전하지 못한’ 인공유산으로 사망에 이르는 여성은 세계적으로 한 해 5만 명에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가 아니다. 2011년 프로라이프의 낙태고발정국 이후 중국에서 원정 임신중절시술을 받고 사망한 여성, 2012년 낙태죄 합헌 판결 이후 불법으로 임신중절시술을 받고 사망한 고3 여학생. 수많은 여성들이 불법으로 음성적인 시술을 받고 합병증이 발생하더라도 처벌이 두려워 제대로 진료를 받지 못하고, 거짓 정보와 브로커에 속아 위험을 무릅쓰며, 고비용 고위험으로 인한 의료의 사각지대로 내몰려 왔다. 
  낙태죄는 죄가 아니되, 여전히 처벌은 유지된다는 헌법재판소의 판결. 이 혼란 속에 피해는 여전히 오롯이 여성의 몫이다. 온라인에는 유산유도약으로 알려진 ‘미프진’을 당일배송 한다는 광고가 넘쳐난다. 우리나라에서 불법인 약품이 당일배송 가능할 리가 없고, 가짜약이 판친다는 것도 이미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속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는 한 여성의 말은 지금 여성들이 처한 현실을 아프게 드러낸다. 임신중절이 불법인 국가에 기부금을 받고 미프진을 보내주는 네덜란드 소재 웹사이트 ‘위민온웹’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의해 불법이라며 차단당했다. 헌법재판소 판결을 단 한 달 앞둔 3월 16일에 굳이, 회의 41초만에 결정된 일이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불법이라는 이 약은 세계보건기구(WHO)에서 2005년부터 ‘필수 의약품’으로 지정되어 세계 60개국 이상에서 판매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임신 초기 가장 안전한 인공유산방법으로 권고되고 있을 만큼 유효성과 안전성이 검증된 약품이다.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미프진에 대한 정보가 알려진 뒤 수요가 급증하고 이에 숱한 여성들이 가짜약을 구매하는 등 피해 사례가 늘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 불법이라는 안이한 변명은 명분조차 없이 여성의 건강권을 더욱 위협할 뿐이다. 약품의 정식 수입에 법적 절차를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면, ‘위민온웹’ 등의 차단을 당장 해제하고 정식 약품에의 안전한 정보를 지금 당장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말 그대로 유산‘유도’제인 미프진은 약 한 알을 먹는 것으로 짠! 하고 인공유산이 완료되는 약이 아니다. 적절한 진료 없는 자가 복용은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약물 복용 이전, 초음파를 통해 임신을 확진하는 것이 가장 먼저다. 소변으로 검사하는 자가 임신테스트로는 자궁외임신이나 임신성 융모막 질환 등 반드시 치료가 필요한 질환과 정상임신을 감별할 수 없다. 약물 복용 이후에도 출혈, 복통 등의 증상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하고, 불완전 유산 가능성이 없는지 추적진료가 필수적이다. 이러한 필요성 때문에 미프진이 도입된 국가들에서도 약물 처방 및 복용, 사후 진료를 위해 최소 2~3회의 병원 방문이 이뤄진다. 

  국내 상황은 어떨까. 우여곡절 끝에 미프진을 복용했다 하더라도, 여성들은 병원 방문을 두려워한다. 내원해서도 약 복용 사실을 숨길 수밖에 없어 적절한 진료를 받기란 어렵다. 최근 진료한 한 여성은 한 달 내내 출혈이 지속되었음에도 ‘불법약을 먹었다’는 이유로 처벌받을까 두려워 병원에 올 수 없었다며, 진료가 끝날 시점에야 (진짜 약인지 알 수 없는) 미프진 복용 사실을 힘겹게 알렸다. 약 복용 사실 유무에 따라 진단과 치료가 전혀 달라질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렇다면 용기를 내어 병원을 방문한다면 적절한 진료를 받을 수 있을까. 의료진 역시 미프진을 비롯하여 안전한 임신중지 방법에 대해 정확한 정보가 없는 것이 국내의 현실이다. 낙태가 불법인 나라에서, 지금껏 임신중지를 의료행위로서 제대로 교육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프진에 대한 정확한 지식 없이 단지 불법이기 때문에 위험천만한 약물로 생각하는 의료진도 상당수이다. 또한 임신중절시술 역시, 임신 초기에 보다 안전한 방식으로 권고되는 흡입술 대신 대부분의 인공유산이 소파술로 이뤄지고 있다. ‘안전한 임신중지’에 대한 의료진의 교육과 연구가 필수적인 이유다.  

  한편 안전한 임신중지를 가로막는 또 하나의 거대장벽은 의료비용이다.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임신 12주 이내 계류유산소파술(자궁 내 태아가 사망한 채 잔존해 있을시 치료목적으로 시행하는 소파술)의 경우 환자의 부담금이 대부분 10만원을 채 넘지 않는다. 하지만 술기상 같은 시술임에도 낙태수술은 지역에 따라 적게는 수십 만원에서 300여 만원에 이르기까지 ‘부르는 게 값’이 되었다. 보건복지부가 낙태수술을 ‘비도덕적 의료행위’로 규정한 데에 반발한 산부인과 의사들의 낙태수술 전면거부 선언 이후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의료진이 감수해야 하는 위험도만큼 여성에게 전가되는 비용이 증가되는 것이다. 

  이러한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여성들은 더욱 위험한 궁지로 내몰리고 있다. 인터넷 상에는 청소년들이 ‘자연유산 되는 법’을 묻는 질문과, 유산되기 위해 남자친구에게 배를 계속 맞았다, 피가 얼마나 나야 유산이 되느냐, 계단에서 일부러 굴렀다 등 상상하기에도 심각한 자해경험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경제적 여유가 없거나 사회적 지위로 인해 의료접근성이 낮은 여성 역시 비슷한 위험에 처해 있다. 국민으로서, 인간으로서 응당 보장받아야 할 건강권. 그러나 임신과 출산은 건강보험으로 지원되나 임신중단 비용은 개인의 책임이라는 논리는 성립할 수 없다. 안전한 임신중단을 위한 의료접근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이 역시 건강보험으로 지원받아야만 마땅하다.          

둘. 내 몸을 허락받지 않을 것 : 사유제의 폐지
  낙태죄의 본질은 결코 생명존중이 아닌, 여성의 몸을 국가가 원하는 규범 안에 가두고 통제하기 위한 역사였다. 낙태버스를 운영하며 ‘애 안 낳는 것이 애국’이었던 시절에도, ‘저출생 시대’가 국가위기라는 지금에도, 국가는 여성의 몸을 인구정책의 도구로 삼아왔다. 여성의 정절과 순결을 강요하는 이데올로기는 여성의 몸을 규범과 비규범으로 구분지었다. 이는 결혼제도 안에서 국가가 요구하는 재생산 노동을 수행하는 어머니의 낙태에는 슬픈 희생으로, 비혼여성이나 청소년의 낙태에는 문란한 낙인으로 각기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또한 허용사유를 명시한 모자보건법은 정상과 비정상의 몸을 가르고 국가가 비정상을 ‘삭제’하고자 했던 우생학적 의도를 끔찍하도록 명백하게 수행해 왔다. 

  강간 피해자는 낙태가 허용되니 합리적이라던가, 이제 사회경제적 사유 정도를 추가하면 된다는 식의 의견들이 있다. 그러나 더 이상 낙태가 이뤄지는 여성의 몸을 범죄화해서는 안 된다. 강간을 당했음을 피해자가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폭력적인 과정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사회경제적 사유에 해당한다는 증명을 위해 여성의 삶을 전시할 것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여성에게 불쌍한 피해자가 되어 국가의 허락을 구걸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배우자나 보호자의 동의가 조건이 되어서도 안 된다. 여느 치료적 수술과 마찬가지로, 임신중지 역시 의료적 행위로서 고려되어야 한다. 사유제의 존치는 어떤 사유가 추가되느냐와 무관하게, 여전히 국가가 여성의 몸을 통제하는 권력을 놓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여성의 몸은 출산도구가 아니며, 범죄도 아니다. 더 이상 여성의 몸에 범죄를 덧씌워 통제해 왔던 역사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셋. 재생산권 논의
  결국 낙태의 가장 명백한 원인이란 원치 않는 임신이다. 그럼에도 이를 방지하는 피임은 개인적(특히 여성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되어 왔다. 피임에 대한 정확한 교육조차 이뤄지지 않은 채, 그 비용 또한 모두 개인의 몫이다. 피임에 실패했을 때조차 이는 여성 개인의 무책임 또는 무지로 소급되며, 결과는 여성의 몸에 온전히 떠넘겨진다. 피임에 대한 정보 부족과 이로 인한 편견은 진료 현장에서도 매번 확인하게 되는데, 이는 10대부터 심지어 50대에 이르기까지 결코 다르지 않다. 안전하고 주체적인 성관계에 대한 어떠한 교육도 받아 본 적 없는 나라에서, 실질적인 피임 교육 또한 이뤄진 바 없는 데 대한 결과다. 성교육이란 여전히 혼전순결이나 조작된 낙태비디오 따위로 실시되고 있는 현실이다. 약국에 젊은 여성이 피임약을 사러 가면 눈치를 봐야 하고, 파트너와 피임을 상의하려 하면 문란한 여자로 보일까 두려운, 여성에 대한 편견과 낙인도 실재한다. 

  재생산권이란 임신과 출산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원하는 임신과 출산을 할 권리와 동등하게 하지 않을 권리 또한 보장되어야 한다. 이를 위한 피임 역시 재생산권으로서 보장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또한 여성의 몸으로 생애 전 과정에 걸쳐 감당해야 하는 월경 역시 재생산권의 범주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장애, 경제적 사유, 비혼 등 개인이 출산과 양육을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라도 아기를 낳고 키울 수 있을 권리. 원하지 않는 임신을 선택하지 않을 권리. 건강하게 임신중지를 할 권리. 건강한 월경용품을 사용할 권리. 월경중단을 선택할 권리. 이 모든 것에 대해 정확하게 교육받고 상담할 수 있는 권리. 이 모든 것이 인간으로서, 국민으로서 응당 누려야할 재생산에 대한 권리로 보장받기 위한 논의가 당장 시작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국가의 의무다. 
 
지금 당장, 국가가 국민에게 해야 할 것을 
  우리는 승리했다. 세상은 바뀌었다. 어제와 다른 오늘이 열렸다. 하지만 ‘법적 공백과 사회적 혼란이 생길 수 있다’는 이유로 낙태‘죄’는 2020년까지 유예되었다. 낙태죄가 죄가 아니라던 4월11일 이후 오늘까지도, 내가 만난 여성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아무것도 없다. 국가가 저지른 죄를 여성의 몸이 감당해 온 어제가 지속되고 있다. 죄가 아닌 여성의 몸에 더 이상 국가의 죄를 떠넘기지 말라. 단 한 명의 여성이라도 더 이상 국가의 기준에 따라 삶을 유예할 수는 없다. 단 한 명의 여성도 죄 아닌 죄를 떠안고 고통 받아서는 안 된다. 지금 당장, 국가가 국민에게 해야 할 것을 하라. 

※ 이 글은 오마이뉴스(제목: 낙태죄 헌법불합치, 진짜 '싸움'의 서막을 열었다)를 통해 먼저 기고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