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과 함께 살아가는 선주민의 자세
작년에 변호사로서의 첫발을 동천에서 시작하게 되면서 지인들에게 “난민” 관련 일을 한다고 했을 때만 해도, 가장 많이 들었던 반응은 “한국에도 난민이 있어?”라는 놀라움과 호기심이 섞인 질문과 “나도 어려운데, 내가 난민이니까 나나 도와줘”라는 싱거운 농담이었다. 난민을 그저 먼나라에서 굶주림에 처한 이들 정도로만 여기던 인식에서 불과 1년만에 참 많은 것들이 변했다. 어떤 이들은 난민을 막연한 공포의 대상으로, 혹은 한국사회를 위협하는 불청객인양 혐오와 미움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다.
누가 난민일까? 최근 법무부는 제주도를 통해 한국으로 피신하여 한국 정부의 보호를 요청한 예멘 난민 신청자들 중 339명에게 인도적 체류허가를 내렸다.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인 신분 또는 정치적 견해라는 난민법상 난민 사유(제2조 제1호)에는 해당하지는 않지만, 예멘의 현재 내전상황으로 인하여 생명이나 신체의 자유를 현저히 침해 당할 수 있다고 인정한 것이다(제2조 제3호). 내전이나 강제징집의 상황에서 피신은 가장 전통적인 난민보호 사유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난민법에 따라 정해진 사유가 아니라는 단편적인 판단 하에 결정한 것이다. 이에 대해 필자가 속해 있는 난민인권네트워크와 제주난민인권을 위한 범도민위원회는 예멘 난민신청자들의 개별적 사유를 철저히 고려하여 재심사하도록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일각에서는 결국 난민인정자가 없는 것을 보고 “역시나 다 가짜난민이었네”라고 보란 듯이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인도적 체류지위’는 시혜적 차원의 용어에도 불구하고, 해외 입법례 및 국제기준에 비추어 보면 ‘보충적 보호’의 정의에 해당한다. 즉 고문방지협약 및 자유권규약에 의해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으나 난민의 박해사유에 포섭되지 않는 사람들을 추가 포섭해야 함을 의미한다.
오늘날 전세계 사람들이 다같이 힘을 모아 해결해야 할 이슈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난민문제이다. 국민국가 체제에 익숙한 한국에서 국제사회로 조금만 눈을 돌리면 본국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난민들이 세계대전 이후 최고치로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난민협약을 비준하고 난민법을 제정한 한국정부는 난민을 보호할 ‘법적 의무’가 있다. 즉 난민제도는 찬반의 대상이 아니며,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선의를 베푸는 정책도 아니다. 기초생활수급자가 수급을 받을 권리가 있듯이,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권리가 있듯이, 난민에게도 박해를 피해 새로운 곳에 정착하여 살아갈 권리가 있는 것이다. 이를 권리가 아닌 시혜라고 여기는 관점에서부터 다수의 횡포는 시작된다. 한국에서 선주민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자신들이 누려온 권력을 가지고 박해를 피해 한국으로 온 난민들을 경계선 밖으로 구분 지으면서 약한 이들이 당연히 누려야 하는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법적 정의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난민 또는 인도적 체류 인정여부는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는지 여부와는 별개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난민에 대한 이미지를 특정 프레임에 넣어 두고 있다. 나이키 신발을 신는다고 해서, 휴대폰을 사용한다고 해서 전쟁터의 총알이 비켜나가지 않음에도, 오히려 강제징집의 위협이 목전에 있어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젊은 남성들을 싸늘한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사회적 약자에게 쓰워진 정형화된 낙인은, 기초생활수급자인 아동은 돈까스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처럼 얼마나 위험하면서도 씁쓸한가.
철학적인 질문을 던져보려 한다. 스스로가 ‘우리’라고 느끼는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그 경계는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 한국인과 결혼한 베트남 여성은 김치를 잘 담그니 ‘우리’인가? 김해 원룸 화재로 세상을 떠난 우즈베키스탄 재외동포 아동은 ‘우리’가 아닌가? 동시대를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우리’와 ‘그들’로 구분하는 것은 국적인가, 인종인가, 종교인가, 문화인가? 생명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가장 합리적인 선택으로 한국에 온 ‘그들’은 또 ‘우리’와 얼마나 다른가? 상해임시정부, 제주 4·3사건, 6·25전쟁을 떠올리며 역지사지하며 포용해야 할 '우리'가 아닌가?
이주민이 증가하는 것은 국제적 흐름이며, 한국사회에 정주하는 구성원 중 한국국적이 없는 사람은 이미 4%가 넘는다. 정부가 산업기반과 경제적 상황을 고려하여 운영 중인 고용허가제를 통해, 저출산에 대한 해결책으로 국제결혼을 적극 장려하여, 대학의 경쟁적인 유학생 유치를 통해 이미 다양한 사람들이 한국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더 이상 국적 또는 인종은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경계가 될 수 없으며, 되어서도 안 된다. 이제는 ‘우리’의 개념을 재정립 해야 한다. 아직도 머리로만 이해하고 있는 단일민족이라는 허울을 심정적으로도 뛰어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자기성찰이 필요하다. 내 안에 있는 혐오, 차별을 겸허히 돌아봐야 한다.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가 바람직한 세상이라고 여기면서도 여전히 낯선 이들에 대해 배타적이지 않았는지, 선주민으로 스스로가 가진 권력을 정당화하고 이주민에 대한 불합리한 차별의 근거로 만들어내지 않았는지 성찰해볼 일이다. 낯설다는 이유로 부정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을 잠시 유보하고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게 되면, 모든 인간이 그렇듯 결국 선한 의지를 가지고 삶의 현장에서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임을 알게 된다. 이제는 선주민으로서 난민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같은 공간을 살아가는 이웃으로 어떠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권영실 재단법인 동천 변호사
이주민, 난민, 빈곤복지, 아동 분야에 관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