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을 바꾸고, 내 삶을 바꾸는 일,
‘직장갑질’을 멈추는데서 출발하자.
이준상/ 전북직장갑질 119
직장은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공간이다. 동시에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다양한 관계가 교차하는 중요한 공간이다. 건강한 삶을 위해서 건강한 일터가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일터 현실은 건강한 일터와 거리가 멀다. 잊을 만하면 드러나는 재벌 일가의 행태를 보자. 노블리스오블리제는 고사하고 우리나라 재벌들은 ‘갑질’이라는 신조어를 널리 알렸다. 땅콩 때문에 움직이던 비행기가 회항하고, 광고에 대한 열정 때문에 직원에게 물병을 던졌던 그들의 갑질은 국민의 분노를 샀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어떤 몰상식한 재벌 일가만의 문제였을까? 사실 오늘날 갑질이라 불리는 이런 일들은 ‘인권 침해' 혹은 '노동권에 대한 침해’ 라는 식의 표현으로 오래전부터 사회적 문제제기가 이루어지고 있던 일들이다. 항공사 갑질 이후에도 업종과 나이를 불문하고 터져 나오는 노동자들의 분노를 보더라도 직장 내 갑질이 어떤 한 직장, 어떤 특수한 시기만의 문제가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이런 갑질이 만연한 이유는 무엇일까? 노동자들을 보호할 법이 없기 때문인가? 우리나라 헌법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뭉칠 권리(단결권), 사용자와 교섭을 요구하고 협약을 체결할 권리(단체교섭권), 집회시위 파업 등 단체로 행동할 권리(단체행동권)를 보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권리를 행사하는 대표적인 조직은 노동조합이다.
그런데 한국사회 노동조합 조직률은 10%에 불과하다. 헌법상의 보장된 노동3권은 노동조합법 등 하위법령에서 크게 제한받고 있다. 겉으론 권리 보장을 해놓았지만 막상 속을 들여다보면 권리가 제한되는부실한 체계인 것이다. 이렇듯 부조리하고 부실한 법체계 또한 노동운동·노동조합을 적대시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권리를 찾는 것을 불온하고 두려운 것으로 느끼게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작년 11월 서울에서 직장갑질 119가 출범했다. 직장갑질 119는 카카오톡 오픈채팅 등 온라인 서비스를 기반으로 갑질사례를 접수, 분류, 공론화해내며 전국 노동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실제 노동조합 결성으로 이어지거나,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직종별로 묶어내는데 기여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우리 전북지역에서도 네 달여의 시범운영 끝에 전북직장갑질119가 6월 18일 출범했다. 2018년 2월부터 6월까지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을 통해 전북지역의 다양한 직장 내 갑질 사례들을 접수받았다. 짧은 시간, 부족한 홍보에도 불구하고 150여 명이 상담방에 참여하여 3,070건의 톡이 오고갔다.
이렇게 채팅방에서 오가고, 접수된 사건들은 한국 사회의 노동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대표적인 사례 몇가지를 보면, 법원 구내식당에서 일했던 노동자마저 최저임금을 보장받지 못했다. 법원 구내식당 하청업체가 추가수당은 커녕 최저임금을 지급하지 않은 것이다. 또 해당 하청업체는 직원의 실제 임금분보다 적은 4대보험료를 행정에 납부하고는, 노동자 임금에서는 보험료를 추가 공제하며 차액을 챙기다가 들통나기도 했다. 법을 잘 지켜야 할 법원에서 조차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다.
도내 중견기업인 삼양화성은 사무직 여성노동자들에게 사실상의 임금삭감을 요구했다가 노동자들이 이를 거절하자 교대제 생산직 업무로 전환시켰다. 법원은 전보를 멈출 것을 명령했고 지방노동위원회도 부당전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법원과 지방노동위원회의 판결이 나왔음에도 회사는 이를 지키지 않고 있다.
군산시각장애인연합회에 위탁된 주간보호센터, 이동지원센터에서 일하는 사회복지노동자들은 본 업무와 관계도 없는 김장, 축제부스운영에 동원됐고 사용주와 그 측근들의 일상적인 폭언과 모욕에 시달리기도 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지역사회에 큰 논란이 일고 있다.
이 사례들 외에도 전북직장갑질 119 오픈채팅방에는 회식자리에서 사장의 술시중을 강요한다던지, 업무 실적을 근거로 퇴사를 강요하고 직장에서 따돌리는 등, 법의 테두리를 교묘히 넘나드는 하소연도 들려왔다.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담배심부름을 전담하고 있다는 하소연도 있었다.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사회이고 법치주의 국가라지만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직장(일터) 앞에서 멈춰져 있다. 불과 1~2년전 광장에 모인 수많은 촛불들은 대통령이라는 권력을 끌어냈다. 모두가 민주적인 사회가 왔다고 환호했었지만 지금 ‘내 삶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자괴섞인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는 이유는 이런 현실 때문이 아닐까...
전북직장갑질 119는 앞으로도 직장과 일하는 노동자들의 삶을 바꿀 수 있도록 노력하고자 한다. 오픈채팅을 기반으로 한 상담은 물론, 갑질 사례를 유형화하고 지역 사회 내에서 직장 내 갑질에 대한 문제의식을 더욱 확장시켜 나갈 것이다. 불합리한 일을 당해도 하소연할 곳조차 마땅치 않은 노동자들이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장을 여는 출발점이 되겠다. 지역을 바꾸고 삶을 바꾸는 일은 해고, 임금체불, 괴롭힘, 폭언욕설, 성희롱 등 온갖 ‘갑질’에 시달리는 직장을 바꾸는 데서 출발한다.
*이준상님은 전북직장갑질 119 총괄스텝이며, 아래로부터노동연대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