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라, 그리고 살게 하라
전주여성의전화 활동가 / 모카
지난 5월 17일, 전북대학교 구정문 앞 광장에서는 ‘나는 너다, 우리가 바꾸자’라는 제목으로 젠더폭력 끝장집회가 있었다. 2년 전 강남역 인근의 남녀공용 화장실에서 일어난 여성혐오 살해사건의 피해자를 추모하며, 동시에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인 ‘아이다호 데이’를 기념하며 열린 집회이다.
젠더폭력 끝장집회가 있기 몇 주 전인 4월, 전주 서부신시가지에서 한 남성이 퇴근 중인 여성을 여자화장실에서 성폭행하려다가 칼로 찔러 심각한 부상을 입히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보다 조금 앞선 4월, 당시 전북대학교 성소수자모임 열린문으로 활동하고 있던 동아리에게 소속 단과대 학생회는 인권침해의 소지가 담긴 양식 제출을 요구하였고 이를 거부한 열린문의 동아리 인준을 취소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를 규탄하며 SNS상에서 해시태그운동을 하던 모임원들에 대한 심각한 2차 피해 또한 일어났다.
‘잘 명명하기’만으로 어떤 문제들은 가시화되고, 저항의 단초가 된다. 2016년의 강남역은 종종 신문에 나고 잊혀지는 ‘묻지마’ 살인사건 쯤으로 지나가지 않았다. 여성들은 이 사건을 ‘여성혐오범죄’라고 부르며 광장으로 나왔다. 동기를 찾을 수 없는 폭력을 ‘묻지마’라고 퉁치던 시대는 갔다. 폭력의 대상이 ‘여성’이라는 점은 너무나도 선명했다. 그런데 재판부는 이 사건을 혐오범죄가 아닌 ‘조현병 환자의 난동’으로 프레이밍하려는 시도를 했다.
젠더폭력이라는 명명하기를 통해 가해자의 여성에 대한 감정적 혐오에서 확장하여, 사회가 ‘여성’이라는 젠더 범주에 들어가는(또는 비-남성으로 보여지는) 집단에 대하여 멸시하거나, 조롱하거나, 숭상하거나, 혐오하거나, 마땅히 폭력을 저질러도 된다고 여기는 것이 여성혐오라는 것을 함께 깨달으며 나는 역설적이게도 해방감을 느꼈다.
수잔 스트라이커는 《트랜스젠더의 역사》에서 트랜스젠더를 이렇게 정의한다. 태어날 때 지정받은 젠더를 떠나는 사람, 그 젠더를 규정하고 억제하기 위해 자기들의 문화가 구성한 경계를 가로지르는 사람이라고. 젠더폭력에서의 ‘젠더’를 위와 같이 읽지 않으면 강남역과 아이다호데이는 만나지 않는다. 기존의 사회 질서처럼 철저히 이분화-본질화된 성별 체계와 이성애주의적 해석으로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LGBTQI에 대한 혐오와 폭력은 계속되며 평행선처럼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상기한 두 사건을 관통하는 ‘젠더폭력’을 만나야 한다. 젠더폭력을 풀어서 이야기하면 ‘젠더에 기반하여 일어나는 폭력’이다. 스트라이커가 말한 것처럼 젠더는 문화적으로 구성되고 규정된 ‘경계’이다. 젠더는 등가집단으로서의 남성과 여성의 경합의 장이 아니다. 규정하는 자와 규정당하는 자의 권력관계이다. 아주 오랫동안 역사를 기술하고, 법과 제도를 만들고 집행하며, 문화적 질서의 작동을 강력하게 지배해 온 남성과 타자화된 비-남성집단이 가지는 불균형을 말한다. ‘건물 화장실에서 성폭력이 일어났다‘는 명제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성별이 저절로 읽힌다면 그것은 젠더적이다. ‘성소수자’라는 사실이 당사자가 원치 않는 상황에서 밝혀졌을 때 사회적 낙인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젠더적이다. 우리는 이 젠더 문제를 읽지 않고서는 여성에 대한 폭력, 성소수자에 대한 폭력을 마주할 수 없다.
5월 17일은 ‘나’와 ‘너’가 만나 ‘우리’로서 공명하며 함께 세상을 바꾸어 보자고 있는 힘껏 외친 날이었다. 광장으로 가는 길, 오락가락하는 봄비 사이로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장미를 보고 떠오른 수많은 생각에 슬퍼지던 참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영영 피해자의 자리에 있지 않을 것이다. 이 사회가 공고하게 다져 놓은 질서에 조그만 균열이라도 내려면 더욱 낯설게 ‘보고’. ‘말하기’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 기존의 젠더질서인 성별 이분법과 이성애주의 자체를 젠더폭력이라고 명명하며 계속해서 지정받은 젠더를 떠나고 경계를 가로지를 것이다.
거센 빗줄기 사이 반짝, 우리가 모여 이야기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행진할 틈이 있었다. 그 짧은 몇 시간동안 강남역과 아이다호가 만나 ‘그래 맞아, 우리 잘못이 아니야. 세상은 바로 여기, 우리로부터 바뀔 거야!’라고 외치며 연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치 축제 같았다. ‘젠더’를 구별의 논리로 사용하지 않기. 개인을 남녀로 분리하고 그것이 자연의-생물학적-질서라고 말하는 것은 가부장제의 논리이다. 우리는 더욱 새로워야 한다. 새롭게 살아 내지 않으면, 지고 만다. 우리 앞의 광장에 펼쳐진 아름다운 인간 범주의 다양성을 조망하며 생각했다. 살라, 그리고 살게 하라!
*글쓴이 소개:
전주여성의전화 활동가이자 언니들의 병원놀이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페미니스트, 퀴어들과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하고, 젠더에 기반한 폭력 없는 세상을 꿈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