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가 중요하다, 민주주의를 원한다면
박래군(인권재단 사람 소장)
지난 4월 29일,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의 23차 촛불집회가 끝났다. 그리고 퇴진행동은 5월 24일 해산선언을 했다. 그 사이에 19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촛불광장에서 외쳤던 적폐청산을 주요한 공약으로 내걸었던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다. 2016년 10월 29일부터 시작되었던 6개월의 대장정으로 박근혜 정권을 끌어내렸고, 국정농단 세력들을 감옥에 보냈다. 박근혜가 감옥에 가는 날, 박근혜가 가로막고 있던 세월호가 마지막 항해를 마치고 목포신항에 들어왔다. 참으로 벅찬 나날들이었고, 그 과정에서 역사적인 일을 우리는 해냈다. 새 정부는 이전 정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소통을 하는 것만으로도 국정지지율의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비정상이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우리는 보고 있다.
1년 전만 해도 암울했다.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을 위해 설치되었던 특별조사위원회는 정부의 방해로 조사 작업을 전혀 하지 못하고 해산되었다. 2015년 11월 민중총궐기 때 물대포에 맞아 중상을 입은 백남기 농민은 의식을 잃은 채 서울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 곳곳에서 아우성이었지만 박근혜 정부는 억지를 부리며 탄압만 강화해갔다. 그러다가 7월부터 이화여대생들이 학교 안에서 촛불을 들기 시작했다. 교육부의 잘못된 정책에 항의하는 농성에 경찰을 학내에 투입해서 학생들을 연행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던 항의투쟁은 급기야 정유라의 부정특례입학 사건에 대한 항의로 발전되었다.
9월 25일, 백남기 농민이 사망했고, 9월 30일 세월호 특조위가 강제 해산되었다. 그 즈음부터 전국적으로 대학생들부터 시작해서 각계각층의 시국선언이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한겨레>가 최순실의 실명을 거론하며 보도를 시작했고, 위기에 몰린 박근혜는 급기야 10월 24일 개헌 카드를 들고 나왔다. 국회 시정연설을 통해서였다. 정치권은 그날 개헌 논의에 빠져들어갔다. 정국이 급하게 변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날 오후 8시 JTBC가 저녁 뉴스를 통해서 최순실의 태블릿 피씨를 공개했다. 이 보도 하나로 한 순간 상황은 급반전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인 10월 25일 오후에 박근혜는 1차 대국민 사과를 내보냈다. 하지만 그 사과가 도리어 국민들의 참고 참았던 분노를 더 자극했다.
그리고 10월 29일 3만 명의 시민들이 비 내리는 가운데서도 청계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다. 그 다음 주인 11월 5일에는 30만 명, 11월 12일 민중총궐기에는 1백만 명이 촛불을 들었다. 이때부터 매주 광화문 광장을 비롯해 전국에서 1백만 명이 운집했다. 그러다가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기 직전인 12월 3일에는 전국에서 230만 명이 촛불을 들고 나왔다. 12월 9일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고, 이때부터 사실상 박근혜 정부는 식물정부가 되었다. 그 겨울 한파에도 매주 주말 촛불은 이어졌다. 그러다가 급기야 올해 3월 10일 헌재는 대통령 탄핵을 재판관 전원 일치로 결정했다.
민주공화국을 살려낸 촛불
광장에 나와서 촛불을 든 시민들이 가장 많이 들었던 구호는 “이게 나라냐!”였다. 이 구호는 낯설지 않았다. 이미 세월호 참사 때도 이 구호를 들었다. 국민을 버린 국가, 그 국가의 수장은 국민이 죽어 가는데 7시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런 모든 것들이 응축되어 터진 게 광장의 촛불이었다. 비로소 국민들은 헌법 1조가 규정한 국체인 ‘민주공화국’의 실체를 보았다. 민주공화국은 헌법 제11조가 말하는 ‘법 앞의 평등’이 실현되는 국가여야 했으나, 대한민국은 헌법 제11조 2항이 금지하는 ‘사회적 특수계급’의 국가로 전락했다. 국가의 모든 정책과 정치는 이들의 이익을 위해서 봉사하는 데로 기울었다. 국민 다수는 이들 특수계급들의 향연을 위한 노예일 뿐이었다.
이런 사실들이, 아니면 국민들이 설마 그럴 리가 하던 일들이 사실이 되어 눈앞에 한꺼번에 등장했다. 불공정과 불평등과 부정의가 반칙과 특권으로 항상적으로 판치는 세상에 대한 분노였고, 그들에 의해서 망가진 민주주의를 시민들의 직접행동으로 되살리려는 실천이었다. 시민들은 비로소 주권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찾았다. 발언과 토론과정을 통해서 표출된 시민들의 의견의 핵심은 불평등이었다. 이런 불평등을 고칠 방안으로 직접민주주의를 들었다.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불신, 정당들에 대한 불신은 너무 컸다. “죽 쒀서 개 줄 수 없다.”는 말은 이런 요구의 집약이었다.
그런데 촛불이 꺼지고 난 다음에 우리는 지난겨울의 그 뜨거웠던 광장을 기억하고 있기나 한 것일까? 일상으로 돌아간 시민들은 문재인 대통령의 개혁에 환호를 보내면서 다시 구경꾼으로 전락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30년 전 6월 항쟁을 시민들이 일구었고, 일정한 성과도 냈지만, 이후에 진행되었던 ‘7·8·9노동자항쟁’과 개헌작업에서는 거리를 두고 관망했던 역사를 되풀이하게 될까 하는 걱정이 그것이다. 물론 그때와 지금의 시민들은 많이 달라졌다고 훨씬 정치적으로 성숙했다고 하지만 말이다.
30년 전 그때 노동자들은 온몸으로 경제, 사회민주화를 주장했다. 만약에 6월 항쟁에 나왔던 시민들이 노동자들과 연대해서 경제민주화, 사회민주화와 관련한 요구로 상승시켰다면 87년 헌법에 보다 분명하게 이들 사항들이 들어갔지 않았겠는가. 일상으로 돌아가고 30년의 국가 방향을 설정하고 그 내용을 담아내는 헌법 개정은 정치인들의 밀실 담합으로 이루어지고 말았으니 지금 우리가 겪는 불평등의 현실은 그때부터 잉태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앞으로 30년을 결정할 개헌
다시 앞으로의 30년을 준비해야 할 시기다. 올해 하반기부터 헌법 개정을 둘러싸고 대한민국은 치열한 토론 국면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은 상수다. 지금 개헌론자들은 국회에서 개헌안을 만들어 놓고 권력구조에 대한 합의를 이루기 위해 암중모색 중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거듭거듭 2018년 6월 지방자치 선거 때 개헌 국민투표도 같이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런 상황들을 염두에 두고 경영계는 경제민주화 조항을 없애거나 약화시키려고 하고 있고, 보수기독교세력들은 성평등 조항이 강화되는 걸 막으려고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손상되는 어떤 헌법 개정에도 자신들이 모든 것을 걸고 싸울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국민의 생명권과 안전에 대한 권리, 이에 대한 국가의 의무를 명시하는 일은 세월호 참사를 겪은 우리 사회에서 절박한 요구다. 심각한 양극화를 시정하기 위한 경제민주화를 강화하고 사회복지 시스템을 강화하기 위한 사회권의 강화도 꼭 필요하다.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헌법에서 ‘노동’이 아닌 ‘근로’라는 표현부터 바꿔야 하고, 노동의 권리와 의무가 같은 지위에 놓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차별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헌법에 어떻게 반영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국민소환제, 국민발안제, 국민투표제의 신설과 강화도 이번에 꼭 이루어야 한다. 권력구조 외에 고민해야 할 부분이 너무도 많다.
30년 전의 실패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당장의 시급한 적폐청산과 개혁을 위한 투쟁을 하면서도 개헌을 준비해야 한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강화하는 2017년 헌법체제, 지금부터 준비해도 빠르지 않다. 촛불시민혁명이 개헌으로 완성될 수 있게 토론해가야 할 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