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게의 몸부림
(‘또 하나의 약속 후기’)


청소년인권행동‘아수나로’
전주지부 은지



※ 이글은 영화 ‘또 하나의 약속’ 후기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최근 삼성반도체 노동자 이야기 ‘또 하나의 약속’은 누적 관객 수 40만 명(2/19기준)이라는 엄청난 성과를 얻으며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삼성의 세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오늘날, 최신전자제품이 아닌 그것을 만드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너무나 생소하고 불편한 이야기다.
 극중 상구(윤미의 아버지)도 윤미의 이야기를 알리기 위해 수많은 언론사, 노동조합, 노무사에 연락하지만 아무도 그의 얘기를 듣지 않는다. 삼성의 제품은 어디로 눈을 돌려도 보일 만큼 많이 쓰고 있지만, ‘나와 상관없는 일이야’, ‘한다고 뭐가 바뀌어?’ 라는 게 대부분의 생각이다. 우리는 그렇게 멍게처럼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의 피로 뭉친 바위에 정착해서 뇌를 소화시켜 버렸나보다.


 이렇게 우리는 대부분 노동자로 살아가면서 노동자와 동일시하지 않는다. 지금 사회에서 ‘노동자’라는 정체성은 그만큼 큰 낙인과 억압에 시달리게 하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또 하나의 약속’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너무나도 불편한 이 시스템을 정면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귀족노조라는 낙인 노동조합에게 찍히는 낙인은 삼성 같은 대기업, 즉 이름 있고 임금이 높은 사업장일 경우에 더욱 심해진다. ‘돈도 많이 받으면서 얼마나 더 받으려고!’ 라는 질타와 함께 ‘귀족노조’라고 불린다. 하지만 이러한 낙인은 현장에 있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한다. 현대건설, STX조선 같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귀족’들은 기본급이 매우 낮다. 이는 대기업 노동자들이 야간노동이나 잔업 등의 성과급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든다.

 
 그렇게 일하다 과로, 산업재해로 죽어가는 노동자들이 한해 수천 명에 이르며 한국은 산재사망자와 노동시간에서 OECD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에 비해 노동조합 조직률은 OECD 꼴찌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노조 신화’ 삼성의 반도체 노동자 피해자 151명, 사망 58명(2014/1월 기준)은 이미 예정된 죽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제 2, 3의 故황유미
 또 하나의 노동자는 바로 청소년이다. 영화에서 故황유미씨가 그러하듯 전문계 고등학교 학생들은 기업으로 향한다. 이들은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SKY를 가기위해 입시경쟁을 하듯 대기업을 가기위해 취업경쟁을 하고, 학교는 취업률을 올리기 위해 이 경쟁을 부추긴다. 기업은 질 좋고 값싼 노동력을 제공받고, 자식만을 바라보며 사는 부모들은 온 동네에 자랑을 한다. 모두에게 좋을 것만 같은 이 굴레는 필연적으로 죽음을 불러온다.


 최근 울산지역에서 폭설로 돌아가신 故김대환씨를 비롯하여 전문계 고등학교 실습생의 경우 노동부, 교육부의 사각지대에 있다. 기업을 위한 정신교육, 참을성 교육은 있지만 정작 노동자를 위한 노동권, 안전 교육은 소홀하다. 취업 이후 관리/감독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매해 일어나는 실습생의 죽음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현장실습, 아르바이트로 수많은 청소년들이 노동을 하고 있지만 이들은 용돈 벌로 온 미성년자로만 취급당한다. 이것은 청소년의 노동소외와 사람이 아닌 기업에게 맞춰져 있는 노동환경을 반증하는 필연들이다.

또 하나의 가족  이렇게 ‘노동조합’, ‘노동자’ 라는 말에 거부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이 영화에 집중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가족’의 이야기, 한 ‘아버지’의 사랑 이야기라는 점이 아닐까. 삼성이 슬로건으로 써온 ‘또 하나의 가족’은 '또 하나의 가족을 죽였다'라고 삼성을 비꼬는 말로 쓰인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틀은 과연 아름답기만 할까?


 극중 윤미와 상구의 대화를 보면, “왜 아프다고 말 안 했나?” “좋은 회사 다닌다고 자랑한 게 누군데! 내 그만두면 아빠는 뭐가 되나!”라는 말이 나온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온 생을 바치고, 자식은 부모의 기대를 위해 온 생을 바친다. 이것은 비단 영화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의 ‘가족’은 서로의 희생위에 존재한다.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참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 ‘가족’의 희생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부모도, 기대에 부응하려 희생하는 자식도 결국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서로 어떤 관계를 맺을지 고민하지 않는다. 그리고 행복을 대학, 취직, 결혼 등의 사회적 명예에 놓고 서로를 재단하고 몰아세운다. 이러한 삶은 행복 하지 않다. 그것이 정말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것일까?
 ‘아빠가 뭐가 되나!’라는 말 속에서 아빠도 딸도 슬프다. 딸이 기특해서? 아니다. 딸의 취직자리가 일생의 꿈이 되어버린 부모가, 부모의 기대에 맞춰 자신을 망가트린 딸이 슬프다. 우리는 여기서 감동을 느껴야 할 것이 아니다. 분노하고 서러워야 한다. 진정으로 서로 의지하고 소중히 여기는 관계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또 하나의 관계
 상구는 윤미의 죽음으로 인해 윤미를 들여다보고 그녀의 의지를 이어나간다. 그렇게 너무나 아프게 죽어간 소중한 가족, 친구, 반도체 노동자의 의지를 이어나가려는 제 2, 3의 상구가 모였다. 유족, 8000여명의 제작두레, 반도체 노동자 인권지킴이 반올림 그리고 40만 명의 관객. 삼성의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살인이 우리에게 ‘또 하나의 관계’를 만들어 준 것이다.


 우리는 극중 난주(노무사)가 했던 말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이유로 ‘이 싸움을 스스로’ 해나가고 있다. 앞으로 재판이나 저들의 논리가 어떻다고 해도 이 싸움의 가장 큰 진실은 죽어간 그리고 함께 싸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이 싸움의 진실을 품에 안고 끝까지 싸우자. 그렇게 바위에 붙은 멍게가 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자.